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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도의 중심 익산] ⑥세계유산 등재위한 가치 규명-진정성·완전성

'익산 천도설' 입증·'선화공주 실존 논란' 풀어야 할 과제

익산 쌍릉 (desk@jjan.kr)

기해년(己亥年·639년) 11월, 벼락으로 제석사지는 화마(火魔)에 휩싸였다. 불당과 탑이 맥없이 무너졌다. 탑 아래 초석에 불사리병, 금강반야경이 든 목칠함이 남았다. 불사리병에는 사리 6개가 있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따르면 왕은 불타버린 절을 다시 짓고 자신을 탄복하게 만든 이 보물들을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사실일까.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은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입증하는 일과 직결돼 있다. 익산역사유적지구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이 역사적 사실과 같은가('진정성'), 궁성·국가사찰·왕릉·산성 등을 갖춘 고대 왕도인가('완전성')를 살펴야 할 것이다.

 

▲ '관세음응험기', 무왕의 '익산 천도설' 입증

 

중국 육조시대 불교의 관세음신앙 관련 문헌'관세음응험기'의 발견은 백제사의 판도라 상자에 비유될 수 있다. 1953년 일본에서 발견된 이 응험기는 교토 소재 천태종 계열 사찰인 청련원이 소장한 문헌으로 중국에서 편찬됐으나 사라지고 일본에서 발견됐다. 여기서 뜻밖에도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枳慕密地)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帝釋精舍)라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로 인해 무광왕(武廣王)은 무왕이란 점에서 의심이 없으며 제석정사 터가 익산에 남아 있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통해 '제석사'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와 목탑터를 찾아내 관세음응험기 기록이 믿을 만하다는 근거가 확보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무왕의 '익산 천도설'에 관한 단서는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은 즉위 12년에 금살령을 내리고 왕흥사를 창건해 도승 30명을 뒀다. 법왕 2년(600)에 창건하고 무왕 35년(634)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발굴조사가 이뤄지면서 목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기 명문에 왕흥사가 위덕왕 24년(577)에 창건됐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그렇다면 여기에 기록된 왕흥사는 과연 부여 규암면에 있는 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미륵사 창건에 '국사원왕흥사(國史元王興寺)'라고 쓰여 있어 미륵사와 왕흥사를 동일한 사찰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왕흥사 목탑지와 미륵사 목탑지 규모만 비교해 봐도 미륵사 목탑이 월등하다. 삼원 가람의 미륵사와 일탑식 가람의 왕흥사의 비교해 봐도 차이가 많다. 따라서 35년이나 걸쳐 완성된 사찰은 부여 왕흥사가 아닌 익산 미륵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선화공주 실존 논란'도 '진정성' 해결 과제

 

"선화공주를 버리기는 아깝다." "억지로 연결하는 게 말이 되나."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로 인해 '선화공주 실존 논란'이 촉발됐다. '진정성'의 또다른 쟁점은 "'삼국유사' 속 선화공주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집중됐다. 사리봉안기에 적힌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무왕·선화공주 합작설'을 주장해왔던 학계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선화공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분리설'을 내세웠다. 미륵사 창건시기는 물론이고 창건주체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 미륵사는 상당한 시일에 걸쳐 조성됐기 때문에 서원(西阮·서탑)이 축조된 639년에는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무왕은 재위기간(40년) 내내 사택적덕의 딸이 계속 왕후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초반에 선화공주가 왕후로 활동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사를 연구해온 노중국 계명대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사리봉안기 발굴로 인해 선화공주를 완전히 내쳐서는 안된다며 '선화공주 실존설'을 부인하진 않았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무왕의 기록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서동(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설화로서 의미는 크지만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하고 있다.

 

▲ 익산역사유적지구, 고대 왕도로 완전성 갖춰

 

익산역사유적지구는 백제사의 비밀을 안고 있는 퍼즐 같다.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묘로 추정되는 익산쌍릉(사적 제87호)과 같이 온전하게 보존된 문화유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나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연동리석불좌상(보물 제45호)·익산 토성(사적 제92호)처럼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문화유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미륵사지(사적 제150호)·제석사지(사적 제405호) 등과 같이 기단부 이하만 남아있는 사적 등도 있다. 이같은 매장문화재의 경우 세계유산 등재 요건인 완전성에 의문을 갖기 쉽다. 하지만 고대 왕궁이나 사찰 대부분이 목조 건축물인 까닭에 석조 건축물에 비해 보존이 어렵다는 점에서 백제 왕도의 성격을 입증해주는 터로서도 '완전성'를 갖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이 일대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신효 왕궁리유적전시관 학예사는 "왕궁터와 무왕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곳 등을 길로 연결한 '무왕길'만 놓고 보더라도 공주나 부여처럼 도심 가운데 존재했다면 재개발로 인해 벌써 사라졌을 것"이라며 "익산역사유적지구는 주변에 산림이 있기 때문에 문화재보호법뿐만 아니라 자연보호법, 산림법, 도시계획법 등 적용을 받아 주변환경까지 잘 보존 돼 완전성이 확보된다"고 덧붙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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