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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양영두 위원장

"25년 공들인 향토 문화행사 자긍심…내년 지역 통합문화축제 결실 기대"

양영두 위원장이 마지막으로 열린 제49회 소충·사선문화제를 치룬 소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양영두 위원장(64). 오랜 세월'소충·사선문화제'와 함께 해온 양 위원장이 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무려 25년만이다. 자신이 주장해 왔던 지역 문화축제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소충·사선문화제는 내년부터 의견제를 비롯해 고추·산머루·치즈축제 등의 지역 축제와 통합·운영된다. 그는 지난달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제49회 소충·사선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치렀다.

 

-이번 소충사선문화제를 끝으로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는데.

 

△22년간 봉사한 해인 2009년부터 제전위원장을 내놓으려 했으나, 군수공백 상태로 임실군정이 혼미해 행정과 제전위원들의 간곡한 뜻을 받들어 3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86년 민주도로 창립된 사선문화제 행사 이후 1999년 군민의 날 소충제와 통합 '소충·사선문화제'위원장으로 추대된 후 만 25년간 무보수로 봉사했고, 제 스스로 5개의 축제(의견제·고추·산머루·치즈축제)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주창하고 나섰으니 내년에는 좋은 결과로 하나된 통합문화축제로 탄생되기를 소망합니다.

 

-이후의 계획은 있습니까.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무주·진안·장수·임실군민과 도민의 뜻을 받들어 나아갈 것입니다. (그는 통합문화축제가 내년에 성공적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올 연말까지 출범작업에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역문화 행사를 전국 행사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그간 어려웠던 점은 없었습니까.

 

△1987년 제1회 창립제전을 치를 때 군부독재 시절이어서 행정당국의 반대와 억압, 방해로 어렵게 치러졌고, 이후 98년까지 군비나 도비의 지원 없이 재정상의 빈곤함으로 매년 적자상태의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당시 행사출연자였던 국악인 조상현씨 등에게 행사 불참 공문이 발송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각 읍·면에서 조직된 수백 명의 제전위원과 재경향우회의 성원, 눈물과 땀이 베인 열정적인 봉사가 계속 이어져 전국적인 향토문화행사로 평가받게 됐지요. 만 25년 사반세기의 길고도 먼 세월이었습니다.

 

전북의 지역문화축제중 제일 적은 예산을 가지고 10억이 넘는 행사와 어깨를 나란히 해온 점에 자긍심을 가집니다.

 

-행사 개최에는 적잖은 예산이 필요합니다. 자치단체에서의 지원도 많지 않았던데. 그렇다고 위원장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고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인데, 어떻게 예산을 충당했습니까.

 

△제일 어려운 것은 재정(財政)문제였지요. 거의 매년 적자가 났지요. 전북의 경제 형편상 서울의 선·후배 인맥을 동원하고, 어느 회사의 경우 위에서 도와주려해도 아래 실무선에서'무엇 때문에 전라도 임실에서 하는 행사를 도와주느냐, 광고효과도 없다'며 반발이 있어 수십번 찾아가 설득해 광고 협찬이나, 기부금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매년 1억에서 많게는 1억3000만원 이상을 협찬 받았습니다. 올해는 힘이 들었지요.

 

군이나 도에서는 사무실 운영비나 인건비 보조를 주지 않아서 광고협찬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행사비에 보태 문화축제를 이끌어왔습니다.

 

이 기회에 그간 도와주신 기업과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일명'마당발'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지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결이 있습니까.

 

△신의(信義), 성실(誠實)을 근본으로 한 저에 대한 믿음이 비결일 것입니다.

 

2~3년 도와주었으니 내년에는 끝내자고 했다가도 진정성을 가지고 고향사랑과 나라사랑을 위해 발로 뛰는 저를 믿고, 또 예산내역을 살펴보니 무보수로 봉사한다는 것을 파악한 뒤에는 계속 후원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70년대 초부터 국회에서 활동하며 쌓은 공직사회, 언론계 인맥과 서울 선·후배들의 변치않는 인맥의 힘도 컸습니다.'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지성이 모여 감천이 된 것이지요.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에 많이 출마했습니다. 그로인해 지역문화행사를 정치활동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데.

 

△14대(무소속), 15대(무소속) 17대 총선(민주당 공천)에 출마했지요.

 

지역문화행사 때문에 정치활동에 덕을 보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봤을 겁니다. 서울에서 저를 돕는 분들이'그렇게 공(功)을 들여도 알아주지도 않고 표도 안주는 그 척박한 곳에 미련 버리고 다른 길을 찾거나 지역을 옮기라'고 충고를 받았으니까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저는 우직하게 앞만 보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지역내의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는 번번이 낙선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지역민들로부터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4·15대 국회는 민심이나 당심이 우선 아니 특정 인맥과 소위 돈 공천이라는 당에 기여도가 판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10년이 가고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저에 대한 진실성이 알려지고, 오해했던 부분, 몰랐던 사실들이 확인되면서 향토문화발전에 기여한 측면과 정치적인 능력 면도 해가 갈수록 새롭게 평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년 총선에도 출마하실 생각입니까.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당심과 민심을 얻는 사람이 지역위원장이 되고, 공천을 받을 것'이라고 밝힌 민주당 정세균 전 대표의 말을 굳게 믿고 있으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결과를 기다릴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문화와 정치중 어느 분야가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1972년에 정치에 입문하였으니 (국회비서관 3갑 상당) 40여년을 전북 정치인(현역으로)중에서도 중앙당에서도 고참급입니다. 적성이 맞으니 끈기와 인내심으로 지금까지 버텼지요.

 

사업을 했더라면 향토문화에 공들인 만큼 노력했다면 큰 성공을 해 중견기업인이 되어있지 않았을까요.

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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