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쑥쑥 올리는 쟁점 사고치기[30]
◆ 자료 1. '하나가 된 세계'와 다문화 상황
오늘날의 세계는 이른바 '하나의 세계'라고 일컬어진다. 간단히 말해 이 세계는 타자가 없는 단일한 세계이다. 우리는 그 연원을 냉전의 종식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이 세계를 '자유'가 지배하는 세계로 만들었으며, 역사는 비로소 끝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더 이상 인류에게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인류는 분열을 넘어 자유의 향유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자유란 사고 파는 자유, 즉 시장에서의 자유였다. 모든 사람은 이제 시장을 통해 성립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고, 시장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세계는 하나인가? 모든 세계가 과연 풍요로운 시장의 은총 속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무역 장벽의 철폐는 그것을 사실로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자본과 화폐의 이동은 사실상 자유롭다. 자유무역협정의 확대는 실제로 많은 상품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전자 매체를 통한 문화콘텐츠의 빠른 확산은 시장의 잠재력을 무한하게 확장시키고 있다. 하나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다문화의 무한한 향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시대'와 '동방신기'를 비롯한 한류가수들의 유럽진출은 다문화주의의 개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제는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유럽의 와인과 치즈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문화의 경계라는 것이 하나가 된 이 세계 속에서 거의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이른바 '다문화 체험'의 현장에서 직접 확인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계는 '하나'가 됨으로써 '여럿'을 구했다.' '다양한 문화는 존중받아야 하고, 우리 모두는 다른 문화를 향유하며 즐거운 삶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세계는 하나인가? 현란한 다문화 콘텐츠는 과연 세계의 경계가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지배가 관철된다고 간주되는 이 세계는 자유롭게 물질적 향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 돈과 권력을 두루 갖춘 사람들만의 세계이다. 다문화주의란 바로 그러한 세계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며, 이른바 '하나가 된 세계'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 서용순, 다문화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자료 2.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
오늘날 다문화주의는 근본적으로 다양성 속에서 자신의 활로를 찾는 자본의 전략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래서 다문화주의가 각광받는 것은 바로 '문화'속에서이다. 문화의 상품화는 다문화 상황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매체들은 우리 문화와 다른 것, 이색적인 문화를 동원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다문화의 향연들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상품일 뿐, 어떠한 진지한 사유도 드러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사태를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한다. 그것은 단지 오락거리, 유흥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다문화 상황을 정치적으로 다루게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메커니즘이 있는데, 하나는 통합을 전제로 하는 다문화주의이며, 나머지 하나는 분리의 전략으로서 정치적 통제이다. 이 둘은 모두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전자는 다문화 상황에 온정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도입한다. 어쨌든 필요에 의해 발생한 다문화 상황을 '우리 모두는 한국인'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온정주의를 통해 하나로 통합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의 다문화주의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온정주의적 시각에 다름 아니다. 이는 차이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내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문화 상황을 통합의 논리에 따라 극복하고자 하는 이 입장은 아주 감성적인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면서 사람들의 온정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들을 아량 있게 받아주어야 한다는 담론, 통합을 통해 국가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담론들이 온정주의적 다문화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온정주의적 담론에서 다문화가 전제로 하는 차이들은 통합을 전제로 하는 차이일 뿐이다. 만약 그러한 차이들이 통합에 장애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한국의 사회적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차이는 배제될 것이다. 균형과 조화의 바깥에 있는 차이는 전혀 배려받지 못한다. 그렇게, 온정주의적 다문화주의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한국인'이 된 사람들, 잠재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전제로 할 뿐이다. 통합되지 않는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렇듯 다문화주의는 확고하게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
/ 서용순, 다문화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자료 3. 텔레비전에 재현된 이방인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의 사적 공간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은 자기 모습 그대로 온전한 형태를 갖고 오지 않는다. 텔레비전 속 이방인들은 항상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된 모습을 띤다. 맥루언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철도 자체이지 철도를 통해 어떤 화물이 운송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철도를 통해 대포가 운송되는 것과 장미꽃이 운송되는 것은 도착지 주민의 삶에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맥루언의 말대로 텔레비전 자체의 존재만으로 지구촌 시대가 열릴 수 있지만 텔레비전이 지구 저편의 모습을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지구촌은 평화로울 수도 있고 전운에 휩싸일 수도 있다.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한국사회 동화에 어려움을 겪는 이방인들은 대부분 고난과 좌절을 겪는 비극적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불법체류 상태로 단속을 두려워하는 노동자, 남편의 폭력과 학대로 가출한 상태이거나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이혼 소송 중인 이주여성, 피부색과 생김새, 어눌한 한국말 등을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혼혈 어린이, 사회부적응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북한 이탈주민 등의 모습으로 뉴스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주로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이크 처리되거나 등을 돌린 뒷모습 혹은 몸의 일부분만이 영상으로 재현된다.
뉴스 속에서 이방인들이 사회적 문제들과 사건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다뤄진다면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들은 이방인들을 긍정적으로 다룰 뿐 아니라 일상적이고 상시적으로 이방인들을 재현한다. 대중은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들을 통해 더 친숙한 형태로 재현된 이방인들을 만난다.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이방인들을 밝고 긍정적인 존재로 재현하기 시작한 것은 명절마다 특집 프로그램으로 반영돼 온 〈외국인 장기자랑>이다. 언젠가부터 불쑥 등장해 명절 단골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이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얻는 재미는 이방인들이 얼마나 한국화돼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얼마나 한복을 맵시 있게 입고 얼마나 한국가요를 능숙하게 불러제끼고 한국인도 평소 접하기 어려운 전통놀이나 음식들을 얼마나 잘 즐기는가를 확인하면서 시청자들은 놀라움과 신기함, 대견함, 나아가 뿌듯함 등을 느낀다. 한국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외국인을 대상화함으로써 한국문화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 주형일, 텔레비전 속 한국의 이방인은 어떻게 재현되는가?
◆ 자료 4. 우리 안의 '브레이비크'들
노르웨이 사건 이후 국내 언론이 재조명한 우리 사회의 반외국인 정서는 우려할 만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은 전체인구의 2.6%, 임금노동자의 4%를 차지한다. 다문화가정도 16만2000가구에 이른다. 그러나 일부 동남아 출신 이주민들은 벌레 취급을 당하고 있다. 파키스탄인들이 그렇다. 그들은 '파퀴벌레'로 불린다. 파키스탄과 바퀴벌레의 합성어다. 이보다 인종차별적이고 왜곡된 편견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발, 다름을 수용하지 않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르웨이도 예외는 아니다. 이민자 인구가 10%를 넘어서면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제2당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극우정당 노르웨이 진보당 지지자가 약 23%에 달하는 현실이 이를 대변한다. 제2의 브레이비크 출현이 우려되는 현실이다.
노르웨이 사건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관용의 시대는 끝났다는 경종인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인가. 우리 안의 브레이비크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한국은 노르웨이와 달라 애초부터 관용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일까. 일자리를 빼앗는 파퀴벌레들더러 돌아가라고 하고 싶은가. 아닐 것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엔 베트남인 며느리들이 넘쳐난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해주는 이들이다. 우리는 언젠가 베트남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삼촌이나 고모가 될 수 있다.
/ 조찬제, 우리 안의 '브레이비크'들
■ 쟁점 논제
1. 논술 논제
자료 1, 2에 나타난 다문화주의를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료 3, 4의 타자와의 공존방식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오.(900자 내외)
* 보낼 곳; yimza@daum.net
2. 면접 논제
다문화주의는 여성문화, 소수파문화 등 여러 유형의 이질적인 문화의 주변문화를 제도권 안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을 이르는 말로 어떤 공통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편에는 단순히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나 세계주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문화주의와 문화다원주의와의 차이점을 알아보고 우리는 정말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가?에 대래 토론해 봅시다. (면접은 주변 학생들과 해보기 바람)
■ 쟁점 자료 비판적 읽기
〈제시문 1>
세상은 하나의 세계이다. '유일한 하나의 세계'는 상품이나 화폐적 기호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주체를 통해 확인되는 '하나의 세계', 즉 살아있는 남녀들의 유일한 세계이다. 그 사람들이란 모든 면에서 '나'와 차이를 지닌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나와 같은 세계에서 호흡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모든 차이와 동일성을 넘어 유일한 세계의 실존을 긍정할 때,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면서 이방인이 아니게 된다. 존재하는 차이에 개의치 않을때, 우리는 그 차이를 극복할 필요도 없다.
〈제시문 2>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만 보면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농촌 노총각들 사이에서 시작된 국제결혼은 이제 국내 전체 결혼의 11%를 넘어섰다. 국내외 체류외국인도 120만명에 육박한다. 바야흐로 다문화 시대이다. 이런 변화에 맞추어 그들이 곧 우리여야 하고, 우리가 곧 그들이어야 한다. 건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지름길인 것이다.
〈제시문 3>
한국의 경우 오랜 시간 동안 단일민족, 단일문화 국가의 신화를 유지해왔다. 최남선,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한국을 단일한 언어, 단일한 민족, 단일한 문화를 가진 상상의 공동체로 재구성해냈고 이것은 이후 100여년 동안 한국의 강력한 국가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이질적인 것을 우리의 사적 공간에 직접 들여놓음으로써 이질적인 것을 친근하게 만든다. 이방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그 담론을 재생산함으로써 차이를 없애려는 공간이다.
〈제시문 4>
외국인 임금노동자, 다문화가정은 모두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다. 국가에 의해 보호받지도 못하고, 어떠한 환대의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합법적인 신분증만 갖지 못했을 뿐 실제 한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다. 그들은 한 사회 안에서 노동하고, 소비하면서 우리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다. 이들은 '가치 없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당당하게 일하고 사는 떳떳한 우리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 쟁점 확대하기
1. 다문화주의를 인정한다
가. 우리는 다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서구의 선진문명과 '아프리카의 눈물'과 같은 모든 문화를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다. 문화뿐만 아니다. 서양과 동양인을 가리지 않고 결혼을 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다문화는 선택이 아니다. 이제는 필수인 사회이다.
나. 텔레비전을 통해 다문화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문화를 이해하려고 한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니다.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첫 단추인 것이다.
다. 다문화 가정보다도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화폐로 보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도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화 속에서 모든 것을 '돈'이라는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의 가치로 인식할 때 다문화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가슴 속에서 싹틀 것이다.
라. 이제 단일민족이 우월하다고 인식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도 세계화의 시간을 보내며 현재에 이른 것이다. 천년의 단일 민족이 아니라 천년동안 세계화되며 살아간 시간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2. 현재의 다문화주의는 이데올로기이다
가. 현재의 다문화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방인들의 노동을 '화폐'로 바꾸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세계는 화폐만을 통해 보편화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나. 우리는 모든 외국인 노동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다문화를 인정하는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통제가 없다. 그들의 일자리가 우리의 부(재산)를 가로챈다는 인식이 없는 것이다.
다. 다문화주의는 온정주의이다. 특히 텔레비전에 나온 외국인들은 '우리도 한국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한국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 이방인에 대한 통제, 추방이 과거 나치에 의해 저질러졌던 학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충분히 현실적이 될 수 있다. 다문화주의를 앞세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환대를 말하는 것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서일 뿐이다.
■ 쟁점 기출문제
1. 논술 : 2011학년도 서강대 수시 1차 일반전형/학교생활우수자 특별전형 구술면접
[문제 1] (가)를 기준으로 할 때 (나)의 서술에서 예상할 수 있는 다문화주의 사회의 단점을 설명하시오.
[문제 2] 당신이 동화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로 이주한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당신은 동화주의 정책의 어떠한 측면에 반대하겠는가?
[문제 3] 한 국가 내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 분열 혹은 갈등'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동화주의, 다문화주의, 배제주의 정책이 가질 수 있는 타당성을 각각 설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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