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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 무형문화재 지정 2인의 삶

한 분야에 평생을 거는 일은 지난하다. 그것도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홀로 외롭게 한 우물을 팔 때는 더욱 그렇다. 무형문화재에 대한 경외감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북도가 최근 소목장(전주장) 소병진씨와 시조창(완창) 김영희씨를 각각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이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삶을 들여다보았다.

 

 

 

■ '땀으로 일궈낸 전주장 복원'

 

- 논문·문헌 채증작업, 골동품점·박물관 발품

 

▲ 소목장 소병진 명장

 

소목장 도무형문화재가 된 소병진씨(61·전주시 송천동)는 오늘의'전주장'을 되살린 장본인이다. 150년 전 사라진 전주장이 그의 노력으로 20년 전 복원돼 지금은 '명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서울 인사동 골동품점이나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었고, 전주장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문헌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학 박사학위 논문,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문헌에 대한 채증작업과 골동품점·박물관 등에 있는 전주장 실물 등을 토대로 전주장 복원에 성공했다. 발품을 아끼지 않은 땀의 결실이었다.

 

"전주장은 다른 장롱에 비해 귀족적이며, 품위가 있습니다. 재료는 통판을 사용하고, 백동이나 무쇠를 붙여 장식이 화려합니다."

 

특히 과거 돈 많은 부자들이 재료를 구비해놓고 목수를 집으로 불러 장을 만들게 했기 때문에 모양이나 크기, 디자인 등이 다양했다. 그런 다양한 전주장들을 복원시키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목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태생과 직결된다. 그가 태어난 완주군 용진면 녹동 마을은 목수 동네였으며, 할아버지·아버지도 목수였다. 자신이 젊었을 때만 해도 마을 사람 중 대목장·소목장만 20여명에 이르렀다. 64년 전주 중앙가구에 입사해 본격적인 목공예의 길에 들어선 그는 초기에는 집을 고치고 수납공간을 만드는 등 상업 가구제작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우연히 전주장을 접하게 됐고, 그 매력에 빠져 복원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생겨 공방을 개설한 뒤 전주장 복원에 성공했다.

 

그가 연간 제작하는 전주장은 3~5개 정도. 1개 작품 당 가공기간만 최소 2년이 걸린다. 0.1mm라도 틀어지면 망치기 때문에 많은 공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장 만드는 것을 그는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했다.

 

전주장이 이어질 수 있게 전수교육관을 만들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박물관을 지어 전주장에 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다.

 

발명특허 1개를 비롯, 상표 등록 25개, 디자인 등록 6개 등을 보유하고 있다.

 

 

 

■ 완제 명맥 잇기 무거운 어깨

 

- 판소리·민요 기반 위에 닦은 시조창 30년

 

▲ 시조창 김영희 명창

 

조선시대 시조창이 널리 보급되면서 시조창에 각 지방의 특색이 묻어났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시조창이 완제시조다.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제, 경상도의 영제, 충청도의 내포제와 달리 완제는 상청과 하청 구분이 뚜렷하다. 또 대중가요의 랩 형식의 사설시조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김월하-정경태-임산본-설명규-박인수로 이어져온 완제시조의 오늘을 이끌어가는 명창이 이번 전북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김영희씨(62·전주시 풍남동)다.

 

정경태 선생과 형님 동생으로 지냈던 아버지(김용철)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시조창을 접했던 김씨는 판소리·민요 등으로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이일주 최승희 김유앵 명창 등이 그의 판소리 스승이었다. 판소리 분야에서 전주대사습놀이 일반부 장원과 명창부 입상, 민요분야 전국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판소리나 민요가 즉흥적이면서 흥겨운 음악이라면, 시조창은 정서적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입니다. 가사 내용을 음미하면서 옛 선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매력이 시조창에 있습니다."

 

30년째 시조창을 해온 그는 시조창 명인 김월하 선생과 임산본 선생에게서도 사사했으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은 현재 시조창 도무형문화재로 있는 박인수 선생이다. 무형문화재 명예보유자로 있는 임산본 선생과 박 선생 등이 연로한 관계로 활동이 뜸한 까닭에 완제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책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실제 그는 전수관에서 문하생들의 교육을 전담해왔으며, 초중고 시조 정가 강사로 활동하며 시조창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난 2007년에는 시조창 개인발표회를 가졌으며, 매년 문하생 발표회를 열고 있다.

 

그의 바람은 크게 두 가지. 그 하나는 젊은층이 전통음악인 시조창에 많이 관심을 갖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전주한옥마을에 시조창이 울려 퍼질 수 있게 시조창 전용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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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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