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가〉
무엇을 “아(我)”라 하며 무엇을 “비아(非我)”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英).로(露:러시아).법(法:프랑스).미(美) 등을 비아라고 하지마는 영.로.법.미 등은 저마다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 무산(無産)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의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시문 나〉
저는 말할 나위 없이 불순(不純)함의 편입니다. 순수함에 대한 열정, 순결함에 대한 광기(狂氣)는 결국 불순함에 대한 증오, 요컨대 타인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가공할 만한 재해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피의 순결에 대한 열정은 가스실에서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지난 수년간 르완다를 피바다로 만들었으며, 신앙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결합해 보스니아와 북아일랜드를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순결에 대한 열정은 종교재판소와 화형대를 만들어 냈고, 30년 전쟁을 통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지금도 샐먼 루시디와 타슬리마 나스린(이 여자의 전투적 여성 해방론을 제가 유보 없이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에게 도피와 은둔 생활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순결에 대한 열정은 스탈린 시대와 냉전 시기의 수많은 정치적 숙청과 크메르에서의 그 끔찍한 킬링필드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한국에서는 색깔 논쟁의 땔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재난을 피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불순함으로 열어 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경우, 믿음의 순결에 대한 열정은 아까 말씀드렸듯 크게 문제될 건 없겠고 문제는 이념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피의 순결에 대한 열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언뜻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이념의 순수함에 대한 열정인 듯 보이지만, 조금 더 먼 안목에서 보면 피의 순수함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인 것 같아요. 그건 한편으로는 이념의 순수성에 대한 열정에도 한쪽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긴 한데, 요컨대 그것은 민족주의의 문제입니다.
― 고종석, 〈불순함에 대한 옹호〉, 숙명여대 2006 정시 인문계열 기출-
〈제시문 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에서 가장 신앙심 깊은 추종자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과, 각 신앙의 존재론적 주장과 영토적 한계 사이에 이질동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에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꾼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 논제의 포인트 및 평가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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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문을 6단 논법으로 재구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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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점논제
1.논술논제
제시문 (가)와 (나)에 드러난 민족주의의 관점을 비교하고, 제시문 (다)를 통해 앞으로 민족주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하시오. (900자 내외)
2.면접논제
최근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말해봅시다.
■ 쟁점 기출문제
2006학년도 숙명여자대학교 정시 인문계 기출문제
문제1. 편협한 민족주의를 경계한 다음 글의 주장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우리 사회에서 접할 수 있는 적절한 예와 함께 서술하시오.
■ 쟁점관련 도서
〈민족과 민족주의〉
〈상상의 공동체〉
■ 쟁점관련 영화
〈한반도〉
〈피아니스트〉
■ 학생 글과 교사총평
〈학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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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문 가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통한 역사의 진행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아와 비아 간의 충돌을 통해 추진력이 생긴다. 아와 비아를 구분하는 기준은 민족, 국가, 계급 등의 공동체이다. 여기서 공동체는 비아인 외부 세력과 끊임없이 분투하려고 하는 성질을 가진다. 아인 민족 공동체는 비아인 타민족과 필연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시문 나에서는 순수성 강조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 경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피와 이념의 순수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인권을 침해한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불순함에 마음을 여는 것이 재난을 막는 한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소속감과 정체성을 무산시킬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더욱이, 불순함에 대한 용인만으로 전쟁 같은 복합적인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제시문 다에서는 민족이라는 것이 인간의 상상에 기반 되어있는 것이라는 점을 들며, 상호존중과 형제애 등을 통해 갈등을 지양하고 평화를 향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비춘다.
제시문 다에서 주장하는 민족이라는 것의 특성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민족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존중하며, 각각의 민족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인류의 보편성을 들어 인권과 평화를 최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결과, 홀로코스트와 종교재판 등 민족과 특정 계층의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날, 민족성을 완벽히 무시할 수는 없으나, 상호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정보화 사회를 기반으로 민족주의의 지향에 있어서 세계적 참사나 개인의 인권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권효제 (전북외고 3학년)
〈교사총평〉
이번 논술문의 주제는 ‘민족주의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하는가?’이다. 민족주의는 양날을 가진 칼이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창조적 에너지를 동원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안으로는 국민을 해치고 밖으로는 다른 민족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
〈독해력〉
〈제시문 가〉는 민족 간 대립적 상황을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바라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제시문 나〉는 순수라는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부정적 사례에 주목하고 불순함의 편에 서겠다는 반어적 주장으로 편협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권효제 학생은 이러한 제시문의 내용과 필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술하고 있다.
〈논리력〉
이번 논제의 요구사항은 두 가지 이다. 첫째, 〈제시문가〉와 〈제시문 나〉의 민족주의 관점을 비교하고 둘째, 〈제시문 다〉를 바탕으로 민족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족공동체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제시문 가〉를 민족주의에 대한 긍정적 관점으로 보고, 〈제시문 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폐단을 제시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드러낸다. 더불어 〈제시문 나〉의 불순함에 대한 용인만으로는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제시하였다. 마지막 문단에서는 〈제시문 다〉를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평화를 제시함으로써 민족주의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표현력〉
권효제 학생은 논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른 논증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잘 표현하였다. 각 제시문의 쟁점을 논리적으로 구체화하였으며 앞으로의 민족주의가 가져야할 방향성 또한 설득력 있게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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