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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년, 미당 서정주] 전북이 낳은 큰 시인…'친일'-'시성' 경계에 다시 서다

일제 부역·독재 찬양 치욕적 삶 / 언어예술로 녹여낸 미학적 성과 / 과오·문학적 성취, 여전히 논쟁

▲ 사진제공=고창군

작품만큼 삶이 논란이 되는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을미년인 올해는 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전북이 낳은 큰 시인이지만 그를 기리는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한국의 토속성을 언어예술로 녹여낸 미학적 성과와 함께 그를 따라다는 것은 일제와 독재에 부응했다는 꼬리표다. 역사의식의 부재는 순수시를 추구한 그의 성향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다. 그가 근현대 시사에서 보여준 문학적 업적과 영욕의 삶은 별개로 평가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논란의 지속이 그를 바로 평가하고 조명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만큼 더욱 필요하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이에 그를 다시 조망한다.

 

△문학관 발길 꾸준히 이어져

 

지난달 27일 오후에 찾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미당시문학관에는 방문객 약 20명이 미당의 생애와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유품과 친필 원고 등을 비롯해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태평양전쟁유족회 고창지부가 2년 8개월간의 요청 끝에 얻어낸 결과로 지난 2004년부터는 친일·친독재 작품 10여점도 같이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폐교된 선운분교 부지를 활용했다. 지난해까지 3억 원을 추가로 들여 시설을 보강하며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2004년부터 문학관 주변에 국화꽃밭이 조성되고, 이를 소재로 한 벽화가 인근 마을에 그려졌다. 일본 왕실 문장인 국화에 대한 논란은 뒤로하고 미당을 상징하는 꽃으로 매년 가을이면 만발해 관광객을 부른다.

▲ 고창 질마재권역 문화센터.

문학관은 지난 1997년 7월 미당시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창립된 뒤 2001년 11월 개관했다. 이후 국화꽃이 필 무렵 질마재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질마재문화축제는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와 미당시문학관이 공동주최해 중앙일보 등의 후원으로 미당문학제, 백일장 등과 연계해 실시된다.

 

문학관 옆에는 43억 원의 예산으로 지어진 질마재권역 문화센터가 지난해 완공해 자리를 잡고 있다. 앞으로의 활용 방안이 숙제인 곳이다.

 

이날 미당시문학관을 지켰던 서동진 문화해설사(62)는 “문인과 문학에 관심있는 단체 방문객을 중심으로 하루 150여명 가량 찾아 온다”고 말했다.

 

문학관과 인접한 개울을 건너면 미당의 생가가 나온다. 미당교와 생가 옆 모정 등이 지어져 있다. 모정 뒤에는 미당의 동생인 서정태 옹(93)이 귀향해 미당을 찾는 사람들과 교우하고 있다.

 

미당에 대한 기념은 고향보다는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서울에서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 2001년부터 1년간 나온 시 가운데 1편을 선정해 미당문학상을 시상한다. 미당이 1970년부터 2000년 타계할 때까지 ‘봉산산방 (蓬蒜山房)’이라 부르며 살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자택은 ‘서정주의 집’이라는 기념관이 됐다.

 

고창군청은 미당의 탄생 100년과 관련 별다른 계획이 없다. 문학관의 연간 운영 예산도 밝히기를 꺼릴 정도로 거론 자체가 버겁다는 반응이었다.

 

고창군 관계자는 “민족 단체의 반대 민원이 심해 미당을 이야기하는 게 매우 조심스럽다”며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는 이어 “질마재문화축제 외에 별도의 행사는 없다”고 밝혔다.

 

△설화적 시의 근원은 고향

 

미당은 1915년 5월18일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다. 60여년간 15권의 시집과 1000여편의 시를 남겼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 에서부터 <귀촉도> (1946), <신라초> (1960), <동천> (1968), <질마재 신화> (1975) 이후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까지 서정시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 미당 시문학관.

그는 고창에서 태어났지만 부안 줄포보통학교를 다녔다. 이후 인촌 김성수의 집안에서 세운 중앙고보 입학 시험에 낙방했지만 당시 인촌의 양부인 김기중의 농토를 관리하던 아버지의 정성으로 보결 입학했다고 전해진다.

 

몸이 약해 병치레가 많았고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던 미당은 1930년 중앙고보에서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이어 고창고보에서도 퇴학 처리가 된다. 이후 방황하며 서울 마포에서 넝마주이를 하다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강원 교장 박한영 대종사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이후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약관의 나이에 당선된다.

 

1940년 만주의 양곡주식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귀국 뒤 1943~4년 시, 소설, 수필, 르포 등 친일작품을 발표하면서 오명을 새긴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전주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 이듬해 조선대 부교수로 옮겼고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창작 활동을 병행한다. 이후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한국 문단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다 2000년 10월 부인이 사망하자 곡기를 끊고 약 두 달 뒤에 작고한다.

 

그는 ‘자화상’, ‘문둥이’ 등을 발표한 초기, 생명파로 불렸다. 이후 샤머니즘, 불교의 윤회, 신라 정신을 탐구하는 ‘선운사 동구’, ‘동천’ 등을 내놓는다.

 

평소 그는 보들레르와 이백을 좋아했고, 김영랑 시인에게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한다. 후기에 이르러 고향에서 글감을 찾았다. 줄포로 이사가기 전 서당을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외가에서 외할머니가 들려준 설화적 이야기를 작품화했다. ‘해일’, ‘신부’, ‘석녀(石女) 한물댁의 한숨’, ‘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등이 그것이다.

 

△친일과 친독재의 오점

 

미당은 일제강점기 말기 1944년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며 ‘오장 마쓰이 송가’ 등과 같이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한다. 이 시는 자살특공대가 돼 영미 항공모함을 뭄뚱이로 내려친 마쓰이 히데오를 찬송하는 내용이다.

 

해방 전국에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면서 좌파 진영이었던 조선문학가동맹에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미당은 현실 참여적인 경향 문학을 지양하고 순수시를 지향했다. 반공사회에서 순수시론은 문단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순수시 또한 우파적인 경향 문학이라는 지적이 뒤따른다.

 

미당은 친일에 이어 친독재라는 두 번째 오점을 찍는다. 1981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전 지원 연설에 나섰다. 당시에도 거센 비난을 받았고, 이후 친일문학인으로 꼽히며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 삭제되기도 했다.

 

일부 문학평론가들은 시에서 보여지는 영원성과 신화적 세계가 소심하고 어린아이같은 미당의 도피처라고 해석했다. 권력지향성이 전라도 시인임에도 ‘신라 바라기’를 했다고 평했다.

 

미당은 생전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언어의 정부(政府)로서 논술할 필요가 있다”며 미당을 극찬했던 고은 시인은 미당 사후 2001년 ‘미당 담론’에서 스승을 두고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시대에 대한 고소공포증에 가까운 굴복’ 등으로 행적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서정태 옹은 “한국 대표 시인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보다 미당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두드러진다”며 “일제시대에 죽어도 그런 글을 안 쓰고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당시 미당은 혁명가가 아니고 문학인이었다”고 말했다.

 

전정구 전북대 교수(국어교육과)는 “개인과 시대가 떨어질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이육사와 대비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친일과 문학적 업적은 다른 측면이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미당의 말에서 보듯 그의 인품이나 민중의식을 찾기보다는 픽션인 문학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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