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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전 열지 못한 아쉬움 커" 고 하반영 화백, 문화계 인사 문상 이어져

 

1970년대 경기전 근처는 미술학도와 화가들의 단골 스케치 장소였다. 고(故) 하반영 선생도 막걸리 한 잔을 걸친 뒤 이젤을 들고 이곳에 나오곤 했다. 데생 연습을 하는 까마득한 후배들을 보면 유쾌하게 말을 걸고 격려했다. 후배 미술인은 하 화백에 대해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회상한다. 몇 십년 전에 봤던 자신을 알아봐주고 언제나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장르를 넘나들며 화폭에서 예술혼을 펼친 하 화백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기행에 가까운 삶은 미술인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곤 했다.

 

지난 25일 향년 98세로 별세한 고 하반영 화백의 빈소에는 그를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26일 찾은 전주시 송천동2가에 있는 장례식장에는 자녀들과 손주들이 빈소를 지키며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가족장으로 치르는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문화예술인의 방문과 애도가 잇따랐다.

 

이날 오후 김남곤 시인, 장명수 전 전북대 총장, 최승범 시인, 홍순무 화백 등이 빈소를 찾아 상주인 하주홍, 첫째 딸 하가로 씨와 며느리 김용옥 수필가 등의 유족과 함께 고인을 추억했다.

 

이들은 당시 고인이 자주 갔던 다방과 음식점, 술집에서 일어난 일화와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백수(白壽)전’을 열지 못한 아쉬움에는 모두가 공감을 표했다.

 

장 전 총장은 “고인은 기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기재라는 말이 덧붙여져야 한다”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한 인간이 다른 사람 3명의 분량을 산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타고난 재주에 노력까지 더해졌는데 백수전을 보지 못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김용옥 씨는 “고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탐구하는 노력파로 백수전을 고대하면서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항상 변화를 추구하며, 생전에 ‘똑같은 것을 몇십 년 반복하면 예술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며 “본인도 상업용 그림과 예술성에 비중은 둔 그림은 구분해서 그렸고, 모작이 눈에 띄어도 ‘그냥 두어라’고 했다”고 보탰다.

 

유족은 죽음을 앞에 둔 예술가의 면모도 들려주었다.

 

하가로 씨는 “고인은 한 달 전부터 농담을 더욱 자주 했다”며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는 보는 사람마다 노래를 부르라고 했고, 본인은 이어폰을 끼고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거룩하거나 경건한 장례는 아버지와 맞지 않다”며 “고독하고 외로운 죽음 앞에서 춤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를 받아들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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