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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운동사 재조명 ③ 정읍 호남의병 유적지 찾아가보니] 무성한 잡초 속 묻힌 의로운 함성

관리 안돼 흉가 방불…말로만 현충시설 / 산내면 훈련장소엔 역사적 흔적 사라져

▲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동의 기념비’를 찾은 이강안 대한광복회 전북지부장(왼쪽)과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무성한 잡초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형민 기자

의병의 날(6월1일)을 하루 앞둔 지난 31일 오후 1시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자리잡은 ‘동의 기념비’.

 

사람 키 만큼 길게 자란 무성한 잡초를 헤집고 들어가다 멈춰 선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치백 회장과 대한광복회 전북지부 이강안 지부장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곳이 아닌가 했는데, 표지판 글씨가 선명했다. ‘동의 기념비’였다.

 

주인공은 임병찬 선생(1851~1916). 군산시 옥구군 서면에서 출생해 항일운동에 벼락처럼 등장한 ‘의병’이다. 그는 쉰 여덟에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의병장 최익현과 사제의 연을 맺고 의병을 모집, 구국의 길에 동참했다.

 

1906년 정읍시 칠보면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과 순창, 전남 곡성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9월 고종 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했으며, 그 후 총사령을 맡은 그는 일제의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일제합병의 부당성을 천명했다. 그러나 1914년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체포되고, 2년 뒤 유배지에서 단식 끝에 순국했다.

 

그가 바로 ‘돈헌 임병찬 선생’이다.

 

그를 만나러 향한 정읍시 산외면에는 돈헌 등 의병들의 넋을 기리는 ‘동의 기념비’가 있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돼 흉가처럼 보였다. 담장과 대문을 갖추는 등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지만, 지금은 잡초가 무성해 들어가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간신히 외부 표지판에 새겨진 글씨를 통해 ‘의병을 기리는 곳’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내일이 의병의 날인데 관리가 전혀 안 돼 있네요. 을사늑약(1905) 때 전국의 의병들도 비분강개했지만 이 정도로 외면하진 않았다”고 이 지부장은 씁쓸해 했다.

 

잠시 후 발길을 돌려 차로 30여 분 거리인 산내면 종성리 ‘호남의병유적지’로 달려갔다. 현장은 더 참혹해 무관심의 단면을 보여줬다.

 

길가에 갑자기 세워진 ‘호남의병유적지’안내 팻말을 따라 산 입구에서 부터 2.5㎞를 올라간 언덕에는 펜션과 치즈체험장, 양떼목장 등 상업적인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유적지는 의병들이 은밀히 모여 훈련을 한 장소로 의병 활동의 요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92호로도 지정된 호남의병유적지. 그 곳에 다다르자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치백 회장은 “우리 역사와 문화는 수 많은 내란과 외침으로 얼룩졌는데, 특히 호남 출신의 의병활동은 더욱 혁혁했다”며 “지금 우리가 바라본 역사적 현장을 잘 다듬어 후손들의 역사책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 발길을 돌리던 찰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의병들의 의로운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란 표지판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 역사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이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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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현 realit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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