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소지역주의에 갇혀선 안돼 / 관련단체의 대승적 자세를
‘님을 위한 행진곡’의 공식 지정을 놓고 벌어진 정부와 시민단체 간 줄다리기가 차라리 부러웠다. 기념일조차 정하지 못한 동학농민혁명이 오버랩되면서다. ‘님’의 지정을 둘러싼 논란은 그 자체로 5·18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새롭게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올해도 기념일 없이 지나가는 동학농민혁명이 안쓰럽다.
법정기념일은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정부가 제정·주관하는 기념일을 말하며 ‘국가기념일’이라고도 한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 주관부처가 정해지고, 부처 자체적으로 예산을 확보해 기념식과 그에 부수되는 행사를 전국적인 범위로 행할 수 있다. 국가기념일에 관한 사항은 법령이 아닌 규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국무회의 의결 등을 거쳐 대통령이 선언만 하면 된다. 현재 5·18민주화운동과 현충일 등 40여개가 국가기념일로 기려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굳이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당위성과 필요성을 갖고 있다. 2004년 제정된 특별법에도 기념일을 지정할 수 있도록 했고, 정부 차원에서도 관심을 두고 있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나도록 기념일 제정을 못하고 있는 것은 기념일 날짜를 두고 정읍시와 고창군간 첨예한 갈등 때문이다. 더 엄밀히 보면 정읍시와 정읍지역 관련 단체에서 고부봉기일(2월14일)과 황토현전승일(5월11일)을 고집하는 데 있다.
실제 지난해 3월 대전 유성에서 전국의 동학농민혁명 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전주화약일(양력 6월11일)에 대한 찬반투표를 통해 기념일로 정하기로 의견을 모아 문화관광부에 전했다. 고창은 기권으로 양해했다. 그러나 정읍시의회가 전주화약일의 상징성과 절차상 문제를 들어 문제가 있다며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해야 한다는 청원을 내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문광부가 최근 다시 전문가 토론회를 거쳐 전주화약일을 기념일로 잠정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력이 떨어진 기념일 제정이 이번에는 꼭 성사되길 바란다.
사실 동학농민혁명 자체가 1년 넘게 전국에 걸쳐 진행된 민중의 봉기였던 만큼 그 의미를 구할 수 있는 날은 수두룩하다. 그동안 논의된 날짜만 해도 고부봉기·특별법공포·무장기포·백산대회·황토현전승·전주성점령·전주화약·집강소설치·2차봉기일·청산기포일·논산결집일·우금치전투일 등 10여개에 이른다. 거론된 이들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굵직한 전기가 됐다. 어느 날짜를 기념일로 삼더라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데 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사건의 발생 날짜를 기념일로 삼을 경우 큰 분란이 없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경우 오랜 기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복잡해졌다. 발생일을 두고 전문가들간 의견이 갈리는 지점에 고부봉기일과 무장기포일이 있다. 고부봉기를 도화선으로 고창 무장에서 전면적인 기포가 이루어진 것을 두고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역과 학자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별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지 않는 한 발생일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이며, 기념일로 지정하는 데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념일 제정을 위해 현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읍시와 정읍지역 관련 단체들의 대승적 자세라고 본다. 전주화약일을 기념일로 정한다고 해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무대가 바뀌지 않는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주체에 이르기까지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심장부다. 국가 차원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공원이 대대적으로 조성되고 있고, 각지에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정읍 이외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념일로 삼을 경우 오히려 혁명의 외연을 더 확대시킬 수 있다. 어떤 날짜로 정하든 기념일 행사는 정읍 황토현에서 갖는 방법도 있다. 소지역주의에 갇혀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 기념일이 아닌, ‘녹두새’ 지정곡을 놓고 정부와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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