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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이두황 100년만에 '처단'

명성황후 시해 주도·동학농민군 진압·토지수탈 협력 / 전주 기린봉 초입에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 13일 제막식 / 민족문제연구소 "과거 청산 안되면 한국사회 미래 없어"

▲ 11일 전주시 기린봉에 위치한 친일파 이두황의 묘비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지부장(사진 오른쪽)이 명성황후 암살과 일제의 수탈에 협력한 이두황의 친일 행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형민기자

“그의 죄를 묻기까지 100년이나 걸렸네요.”

 

광복절을 4일 앞둔 11일 오전 10시. 전주시 중노송동 13-27번지 기린봉 입구에서 인부 2명과 함께 ‘친일파 이두황(1858~1916) 단죄비’를 설치하던 민족문제연구소 김재호 전북지부장은 허허롭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폭염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린봉에 올라가는 초입에 가로 1m, 세로 2m의 크기로 세워진 단죄비에는 ‘백 년 만의 단죄,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이라는 큼직한 제목 아래 단죄비의 설립 목적과 이두황 묘의 약도가 은색 스테인리스에 새겨져 있다.

 

김 지부장은 “이두황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민족 반역자인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단죄를 한 적이 없다”며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 만에 단죄비를 설립하게 된 것은 저에게도 지금껏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한 자기반성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더욱 더 적극적이지 못해 단죄비 설립이 늦어졌다는 김 지부장은 단죄비 설립에 필요한 토지 확보와 제작비 마련에 꼬박 5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김 지부장은 단죄비 설치를 마치고 기자와 함께 기린봉 중턱에 있는 이두황의 묘로 향했다. 역시 친일파 답게(?) 묘의 모양부터가 달랐다. 땅속 깊이 높다란 비석이 박혀 있고 제단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37세에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한 이두황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1910년부터 생을 마감한 1916년까지 전라북도의 도장관(현 도지사)의 요직에 오른 인물이다.

 

비석 앞에 선 김 지부장은 “동학 농민군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은 물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에는 훈련대 1대대장으로 우범선과 이진호, 이주회와 함께 일국의 국모를 살해한 범죄 행각을 벌였고, 1908년에는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른바 일본의 ‘남한대토벌’로 불리던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초토화하는데 앞장섰으며, 1910년부터는 6년 동안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토지 수탈에 협력했다”며 역사 속의 ‘이두황의 죄’를 나열했다.

 

이두황의 묘에서 단죄비까지는 365m의 거리. 이에 대해 김 지부장은 “묘지 옆에 단죄비를 세우면 이두황의 후손들에 의해 훼손될 우려가 높다”며 “특히 우리 민족을 팔고 매국한 대가로 이두황의 후손들이 취득한 땅에 ‘사유지 침탈’이라는 이상한 논란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설치된 단죄비는 이틀 뒤인 13일 오전 11시 기린봉아파트 아래 견훤로 사거리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주관으로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 단죄비 제막식’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다. 이두황의 묘에서 내려오기 전, 김 지부장은 “늦었지만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없다”며 저 멀리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가리켰다. 조선왕조의 발생지인 경기전이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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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현 realit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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