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집필한 전북 의병사 중요 자료 '염재야록' 한글 번역본 조차 없어…역사가치 재조명 절실
영화 ‘암살’ ‘밀정’ ‘덕혜옹주’ 등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전북지역 의병활동을 기록한 독립운동가 조희제 선생(1873~1939)의 ‘염재야록(念齋野錄)’은 외면받고 있다.
1950년 책이 세상에 나온 지 67년이 지났는데도, 다른 지역 의병사와 달리 한글 번역본은 조희제 선생의 고향인 전북 도민들 조차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의병의 날(6월 1일)을 이틀 앞둔 30일 광복회 전북지부 이강안 지부장은 “우리 지역 의병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염재야록’이 도민들에게 생소한 건 뼈 아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염재야록의 탄생 비화
지난 1873년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에서 태어난 조희제 선생은 조선 왕조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는 시대를 살았다.
조희제 선생은 구한말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했던 임실에서도 유독 투철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던 아버지를 보며 ‘염재야록’을 편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염재야록 서문에는 ‘초야에 묻힌 하찮은 벼슬아치나 선비의 경우 의리를 앞세워 적을 공격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전혀 아니었는데도, 그들의 행적은 역사책에 숱하게 빠져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집필 동기가 적혀있다.
조희제 선생은 전북지역을 비롯해 전국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기존에 편찬된 황현의 ‘매천야록’과 박은식의 ‘한국통사’의 장단점을 염재야록에 비교해 적어놓기도 했다.
지난 1931년 완성된 염재야록의 초고는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으로 집 마루 밑에 보관돼 왔다.
‘덕촌’은 조희제 선생이 살던 ‘덕치’를 가리키며, 덕촌수록은 ‘덕촌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는 뜻이다. 전북지역의 의병활동이 기록된 책이 아니라 단순한 마을 이야기를 적은 책처럼 보이게 해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1938년 겨울 조희제 선생은 의병활동사 편찬 사실이 들통나 임실경찰서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이듬해 6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해방이 되고 5년 뒤 1950년 제자 조현수가 마루 밑에 숨겨져 있던 ‘덕촌수록’을 꺼내 총 6권으로 구성 된 ‘염재야록’을 간행했다.
△67년 지난 염재야록 한글 번역본 언제 나오나
염재야록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데, 간행된 지 67년이 지났지만 한글로 된 번역본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광복회 전북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3대 의병사(야사)는 조희제의 염재야록(전북지역)과 황현의 매천야록(전남·충청지역), 송상도의 기려수필(영남지역)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매천야록과 기려수필은 이미 한글 번역은 물론, 다양한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염재야록이 주목받지 못한 데 대해 전문가들은 도내 의병 자료를 역사적 가치로 재조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변주승 교수는 “당시 경찰에 의해 조희제의 글과 문집 등이 압수되면서 남은 자료가 많지 않아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특히 후대 연구자들의 관심이 조희제와 염재야록에 미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광복회 전북지부 이강안 지부장은 “조선 후기 호남 의병은 학계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며 “지역 내에서도 다양한 의병 및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해 번역·발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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