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수군항 궁수장 대덕입니다!”
왕비전의 시녀 단월이다. 위사장 협보가 칼을 단월의 목에서 떼었다가 다시 붙이면서 물었다.
“지금 그놈이 어디 있느냐?”
“조금 전까지 다리가 아프다면서 부식창고 옆방에 있었습니다!”
“잡아라!”
협보가 소리치자 위사들이 달려갔다. 내궁 마당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햇볕이 환한 사시(10시) 무렵, 마당에는 방금 목이 잘린 왕비전 시녀의 시체가 처참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다. 구석에 잡아놓은 시녀들은 50여명이나 된다. 주위를 위사들이 칼을 빼든 채 둘러서 있어서 흉흉한 분위기다. 잠시 후에 달려갔던 위사들이 대덕 종해를 끌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덕은 반항을 했는지 얼굴이 피투성이다.
“덕솔, 도망치려는 것을 잡았습니다.”
위사부장이 보고했다. 머리를 끄덕인 협보가 지시했다.
“그놈을 마당에 꿇려라. 곧 대왕을 모시고 나오겠다.”
협보는 종해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로부터 한 식경쯤이 지났을 때 의자가 대왕전의 청에서 문무 관리들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내궁(內宮)에 신라 첩자가 들락였기 때문에 그와 연관된 역적무리를 토벌했다.”
모두 숨을 죽였고 의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병관부 달솔 진재덕, 내신부 덕솔 연기신 등 17명을 위사대가 잡아 처형했고 그 가족은 종으로 배분될 것이며 재산은 몰수한다.”
단하의 성충, 흥수 등은 의자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곧 생모(生母)인 태왕비와 왕비의 조처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의자가 말했다.
“신라 첩자가 태왕비와 왕비전을 들락였다는 증거가 있다. 지금 잡아놓은 서부 수군항 대덕 종해가 자신이 첩자이며 태왕비와 왕비의 지시를 받아 왔다고 자백을 했다.”
“……”
“증거가 확실한 바 태왕비전을 봉쇄하고 왕비는 폐비함과 동시에 궁 안에 감금한다. 둘은 악의 근원이었다.”
청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성충의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대왕, 대왕께 이렇게 수족을 자르시는 고통을 드린 죄를 제가 받겠습니다.”
의자가 눈만 크게 떴고 성충이 말을 이었다.
“신하로서 사전에 일을 막지 못한 죄를 소신이 받겠습니다.”
“당치 않은 말이다.”
혀를 찬 의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 내가 우유부단하게 질질 끌어왔기 때문이야.”
“대왕, 신하들의 우두머리인 상좌평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난국에 상좌평이 공석이면 되겠는가? 입을 다물어라.”
의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임금이 지은 잘못을 왜 신하가 받느냐? 임금이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대왕.”
“지금은 내부 수습이 시급하다. 상좌평.”
의자가 정색하고 성충을 보았다.
“신라 첩자들이 그동안 수군항에 집중적으로 도당을 배치시켰다. 이를 더 색출하고 수군(水軍)을 예전의 전력으로 되살리는 것이 상좌평 그대가 할 일이다.”
의자의 논리정연함이 되살아났다. 의자는 결코 혼군(混君), 폭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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