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취임한 천진기(56) 국립전주박물관장은 3개월간 전주에 흠뻑 빠져 지냈다.
천 관장은 “전주의 자연경관과 문화·역사 현장을 보면서 왜 전통문화도시인가를 제대로 느꼈다”며 “최근의 3개월이 지난 30년 박물관 생활에서 가장 체험적인 생활을 한 기간이었다”고 밝혔다. 체득한 전주의 이미지를 어떻게 국립전주박물관 운영과 연결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는 천 관장. 취임 3개월을 맞아 그간의 소회와 국립전주박물관 운영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 박물관에 와보니 정원 곳곳에 설치된 해먹이 눈에 띕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취임한 후 가장 먼저 기획한 사업인데요. 박물관의 운영계획은 보통 한 해 전에 세워집니다. 이미 올해 예산·프로그램 등이 짜인 상황에서 전면적으로 바꾸기는 여의치 않았습니다. 인력·예산을 적게 들이면서 변화 효과가 큰 아이디어를 고민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먹 설치입니다. 박물관이 30년 가까이 가꿔온 정원을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내어 준 이유는 수동적이고 고전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관람객은 이제 보는 것에서 나아가 체험하는 것이 더 와 닿는 시대죠. 고고학·역사학 중심 전시의 큰 틀을 변화시키기 어렵지만 박물관 교육·문화 행사를 통해 시민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박물관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엿보입니다. 관장님이 생각하시는 오늘날 박물관이 지녀야 할 역할과 기능은 무엇입니까.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박물관은 미래를 상상하는 곳입니다. 역사적인 관심과 미래의 나침반이 되는 곳이죠. 시민들에게 항상 과거와 현재를 상기하게 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동시에 박물관은 생동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죽은 물건이 들어와서 역사·문화의 새로운 생명력으로 탄생하는 문화의 자궁이라고 말하죠. 단순히 유물의 소장·전시에서 나아가 적극적인 체험·교육·공간 활용을 통해 이웃에 마실가듯이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해요. 근엄하고 폐쇄적인 권위를 벗어 던지고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해먹을 설치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죠.”
- 시민친화적인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계신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으신지요.
“내년에는 전북도민과 전주시민에게 박물관을 통째로 드릴 예정입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지역민의 삶과 문화·여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자 합니다. 박물관에서 동창회나 친목회, 생일잔치를 한다면 어떨까요. 누구나 무료로 경치가 아름다운 박물관 공간을 독점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도 있죠. 양반의 도시에서는 여고 동창회도 박물관에서 한다면, 멋지지 않겠습니까. 단, 조건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나 프로그램을 무조건 하나 듣는 겁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모임에 온 김에 전시 설명 30분 듣는 것이 점차 익숙해지고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소나무와 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정원도 다양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해먹 설치처럼 사람들이 정원에서 머물 수 있는 생태 어린이 놀이터 조성, 야외 전시 등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 올해부터 국립지방박물관 특성화 사업으로 전주는 ‘조선 선비문화’를 특성화하게 됐죠.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실 계획입니까.
“선비의 개념을 명확히 구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선비는 양반과는 또 다른 존재죠. 인격적·학문적·도덕적 완성체이자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비는 어떤 도덕적인 생각을 하고,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실천으로 옮기는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도덕과 도리가 있습니다. 선비가 추구했던 정신과 실천세계는 물질 만능주의가 돼버린 현대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특히 전주는 양반·풍류의 도시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선비문화’를 집중 조명하는 것은 도시의 정체성 측면에서 굉장히 적절합니다.”
- 이와 관련해 생각하고 계신 프로젝트가 있으십니까.
“호·영남을 대표하는 두 선비, 월봉서원의 고봉 기대승과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을 함께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원로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과 26세 아래였던 고봉 기대승은 13년간 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 논쟁을 펼쳤습니다.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어 학문적인 교류를 맺고 함께 시대를 고민한 것이죠. 많은 유학자와 선비가 있지만 이황과 기대승을 통해 지역·세대별 화합을 보여주고, 현시대의 이슈로까지 끌어오고 싶습니다. 오래된 역사·주제를 꺼낸다고 해서 과거에서 머무르면 안 되죠. 박물관 역시 현재에 메시지를 던지는 이슈 파이팅이 있어야 합니다.”
- 박물관의 어린이·청소년 교육 기능도 강조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박물관은 상상하는 곳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행동과 산업으로 성장해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태조 어진 밑에서 뛰놀고 잠을 자고 그림도 그리면서 ‘미래의 지도자는 어떠해야 할까’ 생각하는 아이가 막연히 대통령이 장래 희망인 아이와 비교할 때 분명히 미래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내년부터 어린이박물관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예정입니다. 체험·전시공간에서 일상생활 공간처럼 꾸미고자 합니다. 외국 어린이 박물관을 가보니 식탁과 싱크대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공간에서 온종일 놀고, 먹고, 낮잠도 자고, 배우며 꿈을 꿉니다. 전시장도 2층에서 1층으로 내리고 ‘선비 문화’와 밥상머리 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새롭게 꾸릴 예정입니다.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을 걱정하지 말고 박물관으로 오십시오. 생일잔치도 하고 뛰놀며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자주 오십시오. 한 번에 모든 전시를 보려고 욕심내면 유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유물을 봐도 그 안에 숨겨진 일화와 의미, 가치를 끌어낼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 임기 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연평균 100만 명의 관람객을 모으는 것입니다. 현재 전주박물관의 연평균 방문객 수는 43만 명입니다. 전국에서 비슷한 도시의 국립박물관 규모와 비교하면 관람객이 적은 편인데요. 전통문화도시의 수준과 규모에 걸맞은 박물관 관람률이 있어야 문화적 자부심과 격을 논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은 목표이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그 날 전주시민, 전북도민과 함께 축하하고 즐기는 축제를 만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박물관이 먼저 변하겠습니다. 시민들이 재밌는 공간, 쉬는 공간, 상상하는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문턱을 낮추고 시민과 동행하겠습니다. 많이들 오셔서 100만 번째 관람객이 돼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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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진기 관장은] 국내 동물민속학 권위자, 8년간 민속박물관장 맡아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은 30년 넘게 민속학을 연구해 온 국내 동물민속학의 권위자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까지 지냈다. 안동대 민속학과와 영남대 대학원 문화인류학 석사·중앙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민속학 전공)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199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 문화재관리국 예능민속연구실 등에서 근무했고, 2005년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을 거쳐 2011년에 제13대 국립민속박물관장에 올랐다.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오기 전까지 8년 연속 국립민속박물관 수장 자리에 있었다.
논문으로 ‘한국 띠동물 상징체계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는 <운명을 읽는 코드 열두 동물> , <한국동물민속론> , <중요무형문화재-(2)연극과 놀이> (공저) 등을 냈다. 중요무형문화재-(2)연극과> 한국동물민속론> 운명을>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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