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솔, 영주가 되어라.”
이키타가 물러갔을 때 풍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 안에는 이제 중신(重臣) 대여섯 명만 둘러앉았다.
“전하, 명(命)이시라면 따르겠으나 소장이 감당할 수가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계백이 정색하고 풍을 보았다. 본국에서 성주를 지냈지만 이곳은 체제가 다르다. 백제 성주는 왕이 임명한 후에 수시로 바꿀 수가 있다. 계백이 칠봉산성 성주였다가 수군항장,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까지 지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왜국의 영주는 그곳에서 대(代)를 잇는다. 그곳에서 가신(家臣)을 만들고 영지의 소출에 따라 병사도 양성한다. 하나의 소국(小國)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때 풍이 말했다.
“백제방이 왜 왕실과 함께 왜국을 통치해왔지만 무력(武力)은 본국에서 온 장병들로 충당했다.”
풍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두 눈이 번들거렸다.
“그래서 신라소 놈들이 함부로 날뛰었고 소가 가문이 월권을 해도 강하게 저지를 하지 못했다.”
풍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에 소가 측에서 어젯밤 죽은 아리타와 마사시 영지를 맡기려고 한 것은 나름대로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돌린 풍이 중신(重臣) 백종을 보았다. 백종은 55세로 왜국에서 30년을 지냈다. 장덕 벼슬이나 왜국에서도 6품 소신(小信) 벼슬을 받았다. 왜국의 물정에 통달한 문관(文官)이다.
“장덕, 말해라.”
풍의 지시를 받은 백종이 입을 열었다.
“아리타와 마사시는 어젯밤에 죽었지만 가신(家臣), 군병들이 남아 있습니다. 모두 아리타, 마사시에게 충성하고 있어서 소가 가문이 영지를 빼앗는다고 해도 골머리를 썩일 것입니다.”
백종이 말을 잇는다.
“아리타는 6만5천석, 마사시는 4만3천석 영지를 갖고 50석당 1명씩의 군사를 낼 수가 있으니 각각 1300명, 8백여 명의 군사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가신은 각각 1백여 명 정도는 될 것입니다.”
계백이 잠자코 백종을 보았다. 어젯밤 아리타, 마사시는 가신 10여 명, 군사 1백여 명과 함께 시체가 되었다. 살아남은 가신, 군사들은 제각기 영지로 도망쳤을 것이다. 백종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소가 측은 아리타, 마사시 영지의 안돈을 은솔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때 계백이 물었다.
“김부성과 함께 도주한 이또가 있지 않습니까? 이또 이야기는 없습니까?”
그렇다. 김부성은 왜호족 이또와 함께 도주했다. 그러자 풍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군, 이또가 잡히지 않았지만 이또 영지도 몰수해야 되는 것 아닌가?”
풍의 시선을 받은 백종이 말을 이었다.
“이또 영지는 소가 측 옆입니다. 5만7천석이고 기름진 땅입니다. 소가 측이 제 영지로 편입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교활한 영감 같으니.”
어깨를 부풀린 풍이 옆쪽에 앉은 관리를 보았다.
“시덕, 네가 에미시에게 가거라.”
“예, 전하.”
시덕 등급의 관리가 대답하자 풍이 말을 이었다.
“이또의 영지까지 계백에게 넘긴다면 영지를 안돈시키겠다고 전해라.”
“예, 전하.”
“안돈시키겠다는 말을 세 번쯤 되풀이해서 너희들의 속셈을 다 알고 있다는 표시를 해주어라.”
풍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