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당의 관복을 입고 당의 계급과 관습을 따르며 당황제를 모시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춘추도 당(唐)의 관복을 입고 있다. 어깨를 편 김춘추가 왕좌에 앉아 있는 여왕을 보았다. 여왕 김승만(金勝曼)은 사촌언니인 여왕 김덕만(金德曼)이 비담과의 전쟁 중에 피살되고 나서 왕위에 올랐는데 김춘추의 하인(下人)이나 같았다. 김춘추는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국정을 자신의 집안에서 처리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6백년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당에 사대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왕전하.”
“당황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후에 사사건건 우리 신라에게 트집을 잡고 있소. 경은 무슨 방책이 있소?”
여왕이 주저하며 묻자 김춘추가 쓴웃음을 지었다. 청안에는 30여명의 고관이 품계에 따라 서 있었지만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당은 지난번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의 궤멸당했고 황제는 계백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이 빠졌습니다. 아마 몇 년 못살 것 같습니다.”
여왕이 몸을 굳혔고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전하께서 수를 잘 놓으시니 비단에다 당황제를 칭송하는 글귀를 수로 넣어주시지요. 그것을 당황제께 보내면 좋아할 것입니다.”
“내가 말이요?”
“예, 정사는 소신에게 맡기시고 수를 놓아주시면 그걸 갖고 당황제께 가려고 합니다.”
“경이 말이요?”
“예, 그걸로 달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소.”
여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오늘부터 수를 놓겠소.”
왕좌에서 일어선 여왕이 청을 나갔을 때 김춘추가 헛기침을 하고나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대신들은 감히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때 김춘추가 입을 열었다.
“지금 신라는 적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소.”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서쪽은 백제, 동쪽은 백제의 속령인 왜국, 북쪽은 고구려에, 남쪽 바다는 백제 수군(水軍)에 막혀있으니 믿을 곳이라고는 대국(大國) 당 뿐이오.”
모두 숨을 죽였고 김춘추가 부릅뜬 눈으로 대신들을 보았다. 김춘추가 임명한 대신(大臣)들이다. 비담의 반란을 계기로 비담 일당은 물론 반대파까지 모두 숙청을 한 터라 신라 조정은 모두 김춘추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왜국은 백제방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켜 여왕과 함께 직할통치령을 늘려가는 중이고 은솔 계백은 그곳의 대영주가 되어 무신(武神)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소. 이 상태가 계속 된다면 신라는 말라죽은 나무 꼴이 될 것이오.”
소리치듯 말한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당황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눈 하나를 잃었지만 고구려 백제 연합에 잠을 못자고 있을 것이오. 당을 이용해 원수를 치는 방법밖에 없소.”
“대감, 백제왕 의자가 동방(東方)에 대군을 집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벌써 한 달째인데 사신을 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찬 김부안이 묻자 김춘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자가 아직 합병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야. 대장군에게 전권을 일임했으니 당분간은 막아줄 것이다.”
대장군이란 김유신이다. 김유신과는 처남 매부 사이일 뿐만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수족 같은 사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없으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고 김유신은 김춘추 없이는 진골 왕족들의 무시를 받고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 신라 왕성의 청안에 긴장감이 덮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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