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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애국심

김희관 법무연수원장·前 광주고검장
김희관 법무연수원장·前 광주고검장

100년 전 3월 1일,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우리가 자주독립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사상가 천두슈는‘매주평론’에 기고한 글에서“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했다. 민의에 따르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운동의 영광스러움을 보며 우리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수치를 느끼게 된다”며 3·1운동을 극찬하였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유관순 열사에 대한 공적을 재심사하여 최고 등급 건국훈장인‘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였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기록원은 인터넷을 통해 약 1만 9000건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필자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판결문을 읽으면서 그녀가 얼마나“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하게” 만세운동을 이끌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겨우 17세인 어린 소녀의 애국심과 50세를 훌쩍 넘긴 필자의 애국심의 무게를 저울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앞에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3·1절 연휴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나름 노력했다. TV에서는 가급적 3·1절 특집 다큐멘터리에 채널을 고정시켰고, 책장에서 잠자던 독립운동가들의 책들도 꺼내 읽었다. 내친 김에 집에서 멀지 않은 안창호 선생을 기념한 도산공원에도 가보았다.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했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 앞에 선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춘원 이광수는 도산의 전기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이광수가 도산 사후에 선생께서 머물던 평양 부근 산장을 찾았는데, 산장가는 길 양쪽에 있는 돌들이 하나같이 누워 있지 않고 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도산 선생께서 ‘돌들이 서 있는 것을 보면서 나라도 독립해야 한다는 뜻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일부러 그렇게 세우셨다는 것이었다.

애국심은 학창시절 ‘바른생활’,‘도덕’,‘국민윤리’수업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단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애국심’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애국심을 들먹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취급받게 되었다. 비록 애국심이라는 단어가 독재정권 시절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된 측면은 없지 않으나 그렇지만 애국심이야말로 국가의 존립과 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애국심이라는 용어가 좀 그렇다면 공동체의식이라 불러도 좋다.

미국인으로 한국에 귀화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는 그의 책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에서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동체의식의 부재를 꼽았다. 그의 뼈아픈 지적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북한도, 경기 침체도, 특정 정치인의 행태도 아니다. 가장 큰 위협은 문화적 데카당스(decadence)의 확산이다. 이처럼 퇴락하는 문화 속에서 개개인은 공동체의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생각 없이 음식, 술, 성적 쾌락, 휴가와 스포츠에 탐닉한다. 단기적인 만족을 인생 목표로 삼으며 희생의 가치는 평가 절하한다. 이런 게 전형적인 퇴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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