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도 한 열흘 지나자 봄비가 내렸다. 본디 그러한 모양인지, 봄비 내리는 하늘은 이마 언저리까지 무겁게 내려와 있다. 손바닥으로 싹 훔쳐내듯 봄비 그치고 나면, 부쩍 높아진 하늘 아래 빈자리마다 다투어 꽃이 필 것이다. 그래서일까. 봄비는 생명의 전령처럼 공중을 달아나기 바쁘다. 이렇게 봄비에 유난한 이유는 윤흥길의 장편소설 <문신> 때문이다. 문신>
‘집필에서 출간까지 20년’ ‘거장 윤흥길의 필생의 역작’ 같은 수사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어차어피 <문신> 의 진면목은 그러한 수사가 아니더라도 밤하늘에 콱 박혀 있는 별만큼이나 도드라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윤흥길이라는 큰 작가에 대한 믿음처럼 정확한 일이다. 오히려 <문신> 에서 눈여겨 읽고 싶은 지점은, 봄비에서 연상된 것처럼, 낮게 드리워진 시대와 역사의 무게를 버티며 각자의 삶을 쥐고 흩어져가는 ‘개인’의 생명력이다. 문신> 문신>
약간의 비약을 감안한다면, 겨우내 얼었던 땅속까지 스미어 세상을 향해 생명의 활력을 밀어 올리는 봄비의 상징은, 장편소설 <문신> 에서 전쟁에 끌려가는 남정네들이 자기 몸에 먹물을 스며들게 하는 행위에 닿는다. 전쟁에 나가 죽을 경우 시신으로라도 귀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생겨난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은 죽음보다는 삶을 향한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다. 죽어서도 돌아오겠다는 지극한 생명력은 소설 속 인물들이 저마다 심중에 새긴 각오와 다를 바 없다. 천석꾼 최명배의 물욕이 그렇고, 폐병을 핑계로 끊임없는 자책과 자학으로 스스로를 소모해가는 장남 부용이 그렇다. 이종사촌 배낙철과 어울려 유약한 사회주의자가 된 둘째 아들 귀용과 ‘야소구신’으로 불리는 최명배의 큰 딸 순금도 다르지 않다. 최명배가 1937년 중일전쟁을 정점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우리 민족의 무거운 그림자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캄캄한 시대의 어둠을 헤어나가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문신>
이처럼 윤흥길의 장편소설 <문신> 은 이마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시대와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숨통을 틔워가는 인물들의 몸부림을 유려한 문장으로 곡진하게 펼쳐ㅂ인다. ‘큰 문제에 대해 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문신> 은 다른 말 할 것 없이 큰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봄꽃이 아니 필 리 없지만, 짧아지는 봄밤을 큰 소설로 지새우는 일도 봄꽃의 향을 더하는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신> 문신>
*문신 시인은 2004년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와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다방면에서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그동안 시집 <물가죽 북> , <곁을 주는 일> 과 문학연구서 <현대시의 창작 방법과 교육> 을 냈으며, 지금은 <문예연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예연구> 현대시의> 곁을> 물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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