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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완주 삼례 출신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양칠성

인도네시아 가룻군, 기념사업 추진 나서
올해로 한인 이주 100주년, 수교 47주년

완주 삼례 출신 양칠성(1919~1949).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으로 불린다.

인도네시아 가룻(Garut)의 군수가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쟁에 앞장선 한국인 양칠성의 이름을 도로에 붙이고 기념사업을 하고 싶다’고 거듭 밝혔다는 소식이 최근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양칠성이 누구인지 적잖이 관심이 일고 있다.

특히, 가룻군이 추진하는 기념사업에 한국 측의 참여를 바란다는 뜻을 내비친 것을 두고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운 건데, 왜 한국 정부에게 기념사업 참가를 요청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일본에 물어봐라”는 등 냉소 섞인 비판과 함께, “징병 끌려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져야 했던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등 진실을 밝히고 재조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교차한다.

양칠성은 끌려갔는지 제 발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배속됐다. 3년이 흐른 1945년 8·15광복을 맞이했고, 그는 조선에 돌아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전범 처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였다는 설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남은 그는 네덜란드의 재식민지화 정책에 대항하던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해 ‘폭탄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1948년 네덜란드군에 체포돼 이듬해 8월 총살됐다.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됐고, 인도네시아 역사연구단체인 ‘히스토리카’와 가룻군은 2018년부터 ‘영웅의 날(11월 10일)’에 ‘양칠성 도로’ 명명식을 하고자 논의를 이어왔지만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양칠성은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고 처형되기 직전 일본인들과 ‘천황 만세’를 외쳤다는 연구결과도 있어 국내에서 곱지 않은 시각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잇는 연결점으로 평가받는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1973년 11월에 수교, 올해로 47주년을 맞았다. 특히 올해는 인도네시아 한국인 이주 100주년이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정착한 한국인은 장윤원 선생이다. 그는 1920년 9월 바타비야(자카르타 옛 이름) 항구에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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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elf8901@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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