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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명예 되찾을 수 있게 국가유공자 선정 문턱 낮춰주세요”

허호석 씨 부친 고 허재경 씨, 문맹자 대상 한글야학
1942년 만주서 백의민족단 조직, 독립군에 후원금 전달
‘전북독립운동열전’에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로 등재
독립운동유공 입증 증거자료 없어 독립유공자 인정 못받아

허호석 전북시인협회 고문
허호석 전북시인협회 고문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국가유공자 선정범위를 세분화해 폭을 넓혀줬으면 합니다.”

1940년 일제치하에서 고 허재경 씨는 전국에서 문맹자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을 열었다. ‘배워야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허 씨는 1년4개월간 호롱불빛을 가리고 일경의 눈을 피해 몰래 한글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일경은 허 씨가 야학을 통해 한글을 가르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야학을 덮쳤다. 다행히 허 씨는 인근 마을에 있어 붙잡히지 않았다. 일경이 허 씨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한국을 떠나 만주로 피신했다.

허 씨의 나라를 되찾겠다는 운동은 만주에서도 계속됐다. ‘백의(白衣)민족단’을 조직했다. 백의민족단은 흰옷을 입고 활동했으며 후원금을 모금하고 하천의 사금을 채취·판매한 수익으로 매달 독립군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자 허 씨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허 씨는 지난날의 한글야학원생과 함께 버려진 하천변에 방천둑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고 공평하게 땅을 나눠가졌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1953년 10월 빨치산 부대가 허 씨의 마을을 습격했다. 빨치산 부대는 허씨를 연행해갔다. 지주(地主)라는 이유였다. 허씨는 빨치산이 쏜 총탄에 숨졌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의 명예는 지난 2019년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회복됐다. 광복회 전북지부가 발간한 ‘전북독립운동열전’에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허 씨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유공을 입증할만한 증거자료가 없어서다.

허 씨의 아들인 허호석 전북시인협회 고문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근거는 증거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 판정을 받지 못했다”면서 “수십년 전 일제치하에 숨어살던 유공자는 증거자료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해 국가유공자로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도 유공자, 시·군 명예자 등 등급을 나눠 폭 넓게 독립운동유공자로 선정해야 한다”면서 “유공자 선정의 문턱을 낮춰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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