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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기사

[도전하니 청춘이다]  송권 전주시 여의동 마을술사

가장의 무게 내려놓은 시니어로 새로운 삶의 원동력 '마을술사'에서 찾아
마을 기록하고 해설하며 마을 발전 제안하는 역할에 큰 보람과 재미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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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부터) 송권 전주시 여의동 마을술사가 전주 팔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지역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세림 기자

지역 소멸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구가 팽창하는 서울·수도권과 달리 지방은 계속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대도시로 직장을 찾거나 가족을 따라서 둥지를 옮기자 지방 곳곳에는 빈집이 하나 둘 늘어나는 중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전국 시·도별 장래 인구추계’를 들여다 보면 전북의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176만 명에서 2050년에는 149만 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람이 떠난 자리엔 고향의 문화와 역사가 그대로 존재하지만 이를 제대로 기억하고 후대에 기록으로 남길 이는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 전주지역에서는 마을을 기록하고 해설하며 마을의 발전을 제안하는 역할에 앞장서는 ‘마을술사’가 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시니어로 최근 새로운 삶의 원동력을 마을술사에서 찾았다는 송권(73) 씨를 만나봤다.

 

송씨는 무기력한 생활이 싫어 본업인 농사일과 함께 재미난 일이 하고 싶어 마을술사를 맡기 시작한지도 벌써 3년째가 됐다.

마을술사는 전주지역에서 각자 맡은 마을의 조사 보고서를 제작하고 초·중등 교원과 학생 등을 대상으로 마을여행을 운영하거나 마을 홍보 콘텐츠 발굴에 참여하고 있다.

전주시 여의동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던 그는 학창시절 역사 과목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학생이었다.

여의동 마을술사인 송씨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살고 있는 지역 유래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며 “젊은 시절엔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포도 농사란 생업에 쫓겨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다른 직장과 달리 건강만 허락된다면 정년퇴직이 없는 포도 농사일을 아내와 병행하고 있지만 본업 못지않게 마을술사 일을 제2의 직업처럼 여기고 있다.

송씨는 “지금 아들 2명을 두고 있는데 모두 타지에 머물러 있어 젊은 시절보단 여유가 생겼다”며 “마을술사를 맡고 나서 매일 공부하는 삶이 보람도 있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가 머릿속에만 관심으로 두던 역사 공부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계기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우연히 전주문화원에서 진행하는 역사 강의 소식을 듣고 무작정 아내와 손잡고 찾아간 것이 첫걸음이 됐다.

송씨는 “전주문화원에서 서승 전 원장을 만났고 지금까지 나종우 원장과 김진돈 사무국장과 교류하며 역사를 다시 배우고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역사 교육을 통해서 마을술사로 활동한 뒤 마을 자원을 조사하거나 선정하고 직접 마을여행 코스를 개발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자양분이 됐다”고 밝혔다.

그의 역사 공부는 옛 동산동이란 명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역의 정서와 특성을 반영한 ‘여의동’이란 새 옷을 입게 된 역사의 시작에 기여한 토대가 됐다.

동산동은 1907년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 기업 창업자의 장남 이와사키 하시야(岩崎久彌)가 자신의 아버지 호인 '동산(東山)'을 따서 창설한 동산 농사주식회사 전주지점이 위치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시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동산동의 명칭 변경을 추진했고 송씨는 명칭변경추진위원회와 함께 시민들이 제안한 36개 명칭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응모한 여의동과 쪽구름동에 대해 검토하고 부르기 쉬운 명칭인 ‘여의동’으로 선정하는데 목소리를 냈다.

송씨는 “여의동은 '뜻을 이뤄주고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다'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며 “역사를 공부하며 지역 유래를 알아가다 보니 여의동 일대에 덕룡·구룡·발용·용암·용정 등 유난히 용과 관련된 마을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지역의 특색과 자긍심을 높이는 새로운 이름인 ‘여의동’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송씨는 여의동에서 마을술사 외에도 전주서원시니어클럽에서는 우리동네 역사문화재알리미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주문화원 감사 등 직책도 많아 명함과 신분증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

또한 그는 역사를 알면 알수록 서예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래서 옛 동산동(현재 여의동) 주민센터에서 운영 중인 서예교실의 회장 역할을 맡아 수강생들과 묵향 가득한 서예 작품 전시회를 펼치기도 했다.

여의동 서예교실 수업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자리가 부족했고 대기 인원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활동이다, 

송씨는 “서예교실을 찾는 주민들은 거의 농사꾼들이지만 서예의 꿈을 펼치기 위해 저 먼 조촌동에서 여의동 주민센터를 찾고 있다”며 “고물가 시대에 회비 2만 원으로 운영하기엔 빠듯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고 서예교실 수강생의 평균 나이도 75세로 가장 나이가 어린 회원은 60대 초반에서 많게는 89세로 다양하게 구성돼있다”고 말했다. 

그가 회장을 역임한 서예교실은 서명숙 강사의 지도로 전국 규모의 서예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개인마다 개성과 실력을 겸비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 그가 요즘 집처럼 자주 드나드는 곳이 또 있다. 

전주 팔복동에 위치한 팔과정이다.

팔과정은 광해군 시절 전주 팔복동 반룡리에 학문이 뛰어나 진사에 합격한 국포(菊圃) 송사심(宋士深, 1584~1625)이 반룡서숙을 개설해 후진양성에 뛰어난 공적을 남겨 그의 문하에서 문과 급제자가 8명이나 배출된 것을 기념하고자 정자를 만들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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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권 전주시 여의동 마을술사

송씨는 “옛 할아버지 때부터 400년 넘게 살고 전주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며 “고향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 지역에 살았던 선조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어떻게 살았는지 마을술사와 역사문화알리미로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경우처럼 인구 구조가 고령화 돼 있는 전북지역의 경우 젊은 층이 점차 타지로 유출되는 상황 속에 터전을 지키는 시니어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활동 범위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는 추세다.

이에 대해 송씨는 “시니어들이 도전을 두려워하거나 나이에 연연해 사회 활동이 결코 위축되면 안 된다”며 “평소 관심 있는 분야에 매진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활력소가 생기기 마련이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나이가 들면 여생이 얼마나 되나 생각하기 마련인데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청춘이고 얼마든지 도전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며 “노인정에서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재미없게 노년을 보내는 것보다 마을술사를 하면서 말동무를 사귀면 날마다 새롭고 재미있다”고 덧붙였다.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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