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매를 키우며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이 대학에 합격하는 날,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결혼하는 날, 손녀가 태어나는 날, 직장에 취직이 되는 날 등 그 때마다 가장 기쁜 날을 만나곤 하였다. 이번엔 딸의 박사 학위취득을 축하하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큰 공부를 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미국으로 건너간 딸이었다. 대학부터 10년 넘도록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나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미국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나의 미국방문은 밀렸던 것이다.
내 아이들이 살던 곳은 어바나와 샴페인이라는 두 지역에 걸쳐서 넓게 자리 잡은 대학교를 중심으로 공부, 일, 생활이 어우러져 있고 지성과 낭만을 느끼게 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이는 공부하던 건물과 교정, 자주 들렀다는 여러 종류의 음식점들, 같은 대학교에 다녔던 남동생과 함께 생활했던 집, 손녀가 태어난 병원, 석•박사 과정 중에 다녔던 직장 등을 두루 다니며 소개하고 인사시키고 하는데 가슴으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오랫동안 동생과 함께 이렇게 낯선 곳에서 어려운 공부를 해냈다니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웠다.
박사학위 수여식 날이다. 여러 깃발을 앞세우고 교수님들, 박사들, 석사들, 학사들이 차례로 학위복을 입고 입장하는 행진은 세계의 평화를 이끌어갈 군단의 모습처럼 늠름하고 자랑스러웠다.
크고 웅장한 단상에서 흰머리의 노교수가 멋진 박사후드를 딸에게 둘러주며 환한 미소로 포옹하는 그 순간 또 하나의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을 선물로 받고 있었다. 감동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쏴~!’하고 가슴을 내리쳤다.
오후에는 호숫가에 자리 잡은 멋진 지도교수님 댁에 초대받아 가보니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까지 참석한 축하파티를 열어주는 교수님의 자상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에 감동의 눈물이 또 밀려왔다. 교수님은 딸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매우 기쁘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집 앞의 호수에는 오리를 포함하여 약 20종류의 새들이 철따라 다녀가고, 정원의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은 교수 부부가 함께 가꾼다고 하시면서 거친 두 손을 보여주며 아주 즐거워하신다. 음식의 서빙과 사진 촬영은 교수님의 남편이 맡아서 즐겁게 해주셨다. 꿈인가 싶을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다.
돌이켜보니 다시 시작하라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만큼 길고 힘겨운 세월이었다. 아이들이 먼 타국에서 낯선 언어로 공부하고 시험보고 학점 받으며 고난의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늘 위로가 되었고 희망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이제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왔던 무거운 마지막 짐을 내려놓으려 한다. 마지막이란 말이 조금은 걸리지만 자식들의 인생에 얽히지 않고 기도로 사랑하며 한 발 뒤에 있겠다는 의미의 다짐이다.
박사학위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임을 인증하는 최고 수준의 학위이다. 그 어려운 과정을 해냈으니 앞으로의 인생은 그들의 몫이고 잘 헤쳐 나아갈 것임을 확신한다.
많은 세월이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가운데 두 아이가 성장하여 모두 안정된 길로 들어섰으니 이제 내 갈 길을 새롭게 세우려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설렐까, 또 다른 시작이어서 그런가?
새로운 삶에서는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 감미로운 심장의 소리를 감사히 느끼며 자유로운 영혼의 빛으로 다시 태어나련다.
주님의 이끄심을 소망하기에 조용히 두 손 모으고 기도한다.
주님, 이제 경쟁에서 이겨야할 일을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잘못한 일들을 보속하는 삶을 살겠나이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주님께 순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사함을 찾아 기쁘게 감사하겠나이다.
자식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바라지 않으며, 고통과 슬픔으로 아파하는 이의 손을 잡고 마음을 다 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쓸쓸하고 외로운 이에게 다가가 따뜻한 미소로 말을 건넬 때 그에게 위안이 되게 하소서. 늘 주님의 평화 안에서 숨을 편안히 쉬고 싶나이다.
△최인숙씨는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호원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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