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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전북의 문학 명소] 10. 문학으로 읽는 아프고 당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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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인의총과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 교룡산성.

△혼은 쉽사리 소멸하지 않는다, 만인의총

만인의총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항전하다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이다. 그곳 광장에 서 있는 노래탑 <오늘이 오늘이소서>는 아무리 정교한 정책으로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해도 그 혼은 쉽사리 소멸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새겨 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함락한 왜군은 조선의 도예기술을 얻기 위해 이삼평·박평의 등 2백여 명의 도공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일본에서 도예촌을 형성했고, 그 후손들은 지금 일본 도자기산업을 이끄는 중심인물이 됐다. 이삼평은 아리따야끼의 도조로 일본 도자기의 조상으로 추앙받으며, 박평의는 사쓰마야끼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의 양대 산맥을 이끌고 있다. 사쓰마야끼의 심수관 가문은 현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노래 <오늘이 오늘이소서>가 이들의 삶에 깊이 다가선 것은 대한해협에서 큰 불덩이 하나가 날아와 마을 뒷산에 떨어지면서부터다. 사람들은 이 일을 모두 화목하게 살라는 단군의 계시로 해석했고, 그 자리에 단군 사당인 옥산궁을 짓고 해마다 음력 9월 14일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에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날이 샌다 해도 언제나 오늘과 같은 날이 되게 하소서’라는 내용의 <오늘이 오늘이소서>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불렸던 이 노래는 고달픈 현실에서 오늘만을 헤아려 기다려 왔으니 마음껏 놀아보자는 내용의 노동요다. 실제로 남원에서 채록돼『청구영언』(1728)에 실렸다.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1988년 광한루에서 귀향음악회를 열었고, 이때 이 노래가 채록된 남원에 노래를 돌려주는 전수식을 했다. 남원문화원에서는 이 노래의 역사적 의의를 잊지 않기 위해 1995년 노래탑을 세웠다. 탑 전면에 악보를 새겼고, 후면에는 가사를 담았다. 

일본에서 여러 대에 걸쳐 한국의 성(姓)을 유지하며 뿌리를 지킨 그 정신세계와 찬란한 예술 세계는 춘향테마파크에 2011년 개관한 심수관전시관에서 엿볼 수 있으며, 후손들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김양오의 동화『도자기에 핀 눈물꽃』(빈빈책방·2020)에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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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이치전적지와 대둔산 정상.

△하늘 같은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길, 대둔산

기암괴석이 기치창검처럼 늘어선 대둔산은 이름의 유래도 갖가지다. 옛 이름은 ‘한듬산’. 계룡산의 지세와 겨루다 패해 한이 맺힌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말로 ‘크다’는 뜻의 ‘한’과 ‘덩이’라는 뜻의 ‘듬’을 한자로 만들면서 대둔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 맺힌 산’이라는 이름처럼 이곳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대둔산 일대에서 김제군수 정담(?∼1592)이 이끄는 의병대와 권율(1537∼1599) 장군의 군대가 왜군과 맞서 ‘이치대첩’으로 불리는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대둔산에서 뻗어 내린 배티재 정상에 이치대첩비가 있다. 

조선 말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도 이곳에서 일본군과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내가 향해 갈 곳이 한 군데 있긴 있소.”

은명기가 잠시 신일균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버릇처럼 그의 얼굴을 살핀 것이다. 신일균이 그런 기색을 눈치 챘는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신형, 그곳이 고산현의 대둔산이오. 저 장형이 살렸다는 최대웅도 거기에 있을 거외다. 내가 망설인 이유는 신형이 때아닌 고생을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소.”

“염려해주시니 고맙습니다만, 신일균은 이미 그를 보냈던 관군에서도 죽었고 내 마음속에서도 죽은 지 오랩니다. 대둔산에 가거든 어디를 찾아야 하오이까?”

“안심사에 가면 아마 길이 열릴 것이오.” ∥이병천의 소설『마지막 조선검 은명기3』

 

대둔산 마루 삼선계단 부근 ‘대둔산 동학군 최후항전지’ 표지가 있어 이 역사를 후세에 알리고 있으며, 전투에서 ‘홀로 남은 어린 소년의 이야기’는 완주 출신 이병천의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에 담겨 있다. 

소설가 송기숙의 대하소설『녹두장군』에도 대둔산이 나온다. 

 

그들이 대둔산 기슭의 당마루란 동네에 이르렀을 때는 새벽닭이 두홰를 치고 있었다. 이 당마루는 진안과 무주에서 올라오는 길과 이쪽 고산에서 올라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다. 여기에는 대둔산에 산채를 가지고 있는 임문한의 졸개 김오봉이가 주막을 내고 있었다. ∥송기숙의 소설『녹두장군1』

 

운무에 가렸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대둔산의 기암들. 대둔산의 바위산들이 장사들의 근육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름 없이 스러져 간 민초들의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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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회문산 정상과 청계리 폐금광.

△한 많은 역사를 간직한 회문산

회문산은 한 많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동학농민혁명과 구한말 항일투쟁의 근거지였으며, 1948년 여순사건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도당본부를 이곳에 옮기고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저항의 산’이며, ‘피의 산’이며, ‘피난의 산’이다. 

 

사방에서 밀려온 수백 명의 전투원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중부능선을 시퍼렇게 덮으며 밀려오는 국군부대에게 총탄과 수류탄을 퍼붓고 있었다. 여기저기 흥건히 고인 빗물이 피와 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부상자고 전투원이고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바로 생지옥이었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 부분

 

회문산은 소설『남부군』(두레·1988)이 출간되면서 이곳이 빨치산의 마지막 결전지였음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8년 출간돼 50만 부 이상 팔린 이 책의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던 이태(1922∼1997)이다. 그는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돼 북한 조선통신 기자가 되었으며, 전주에서 통신업무를 보다가 연합군이 상륙한 1950년 9월 전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순창 구림면 여분산(엽운산·774m)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이 되었다. 이후 회문산으로 옮겨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됐고, 1952년 3월 토벌대에 체포될 때까지 17개월 동안 빨치산으로 활동한다. 그래서 저자는 서슬선 칼날 위를 걷는 듯한 빨치산의 하루하루와 극단적인 정황 속에서 나누는 남녀의 애환 등을 너무도 생생하게 펼쳐 놓았다. 1951년 초봄, 투구바위. 1만여 명으로 구성된 토벌대의 대규모 작전이 펼쳐졌지만, 그 포위를 뚫고 식량을 구하러 떠나는 빨치산 유격대가 있었다. ‘뜨물국 같은 멀건 죽’으로 ‘비장한 향연’을 벌이지만, 화력에서 밀리는 빨치산들은 전열도 가다듬지 못하고 흩어져 지리산과 변산반도로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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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전화(戰火) 탓에 회문산에서는 고목을 찾기 힘들고, 빨치산의 훈련장이었던 곳에 체력단련장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찾기도 어렵지만, 비목공원과 빨치산사령부 자리 등의 안내판이 당시의 역사를 짐작게 한다. 그래도 숲은 언제나 호젓하다. 회문산 자락을 끌어안은 채 흐르는 섬진강 풍경도 늘 푸근하고 정겹다. 강 따라 길도 흐른다. 강물이 구부러지면 모진 역사도 슬며시 굽이돌지만, 길은 계속 이어진다. / 최기우(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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