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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함께 걷는 길 – 박서진

낯선 길이다. 4차선 넓은 도로 양쪽으로 자동차가 나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두 구역쯤 걸으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는, 담이 없는 집들이 넓은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렇게 많은 데도 똑같은 집은 없다. 차들이 드문드문 다니는 도로에는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고풍스러운 자태로 서 있었다. 중간중간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을 집어가는 청솔모들의 바지런한 발길이 자주 눈에 띄었다. 언니랑 여동생이랑 셋이 14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간 미국이었다. 막내 여동생이 사는 뉴욕은 한국과 11시간 시차가 나 낮과 밤이 거꾸로였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청소를 했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전자레인지를 닦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옷 정리도 하고 밖에 나와 있는 이불을 빨아서 들여 놓았다. 그리고 나온 산책길이었다. 셋은 그냥 말없이 걸었다. 그런데 언니가 이야기를 꺼냈다. 명선이랑 걸었던 길이야. 그때가 마지막이었네. 동생이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내가 걷고 있던 낯선 그 길이 정겹게 다가왔다. 이 길이 내 막내 여동생이 걸었던 길이라니! 내 동생 명선이가 걸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모든 정경이 따뜻하게 보였다. 나는 신발을 벗어 들었다. 그리고 맨발로 명선이가 걸었다는 그 길에 뿌리를 내리듯 천천히 걸었다. 명선이는 올 2월에 한국에 나왔다. 뉴욕으로 건너간 지 11년 만이었다. 전주에 사는 언니랑 나는 동생을 보기 위해 엄마가 살고 계시는 서울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명선이는 대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는 명선이를 부를 때 천사라고 불렀다. 배려심 많고 따뜻하고 언제나 솔선수범하며 잘 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색을 할 수 없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얼굴빛이 거의 회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프니? 내가 물었다. 계속 하혈을 해. 언제부터? 좀 됐어. 병원엔 가봤어? 예약해놓고 왔어. 그동안 나오고 싶어도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못 나왔었다. 두 해 전 영주권자가 되었지만 하는 일이 바쁘다며 나오지 않았다. 네일 가게에서 일해 혼자 두 아이를 교육했던 동생이었다. 나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설령 어디가 어떻게 아프더라도 착한 내 동생은 치료만 하면 될 거라고. 마침 외국에 나가 있던 남동생도 들어 와 엄마 소원대로 6남매가 다 모여 사진도 찍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그곳에서 이틀 후 서울에 사는 여동생까지 전주로 데리고 왔다. 착한 동생은 힘없이 웃고 힘없이 말했지만,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아 언니, 아무렇지도 않아.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미국에서 간다고 말을 듣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우리 네 자매를 데리고 부안으로 갔다. 부안 해변이 보이는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하섬으로 들어가는 해변 모래사장에서 사진도 찍고 숨차지 않게 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부안 마실길을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고 채석강 주변에서 회도 먹었다. 명선이는 미국에 돌아가서 병원을 갔다. 그리고 자궁내막암이 번져 말기 암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두 번만 받고 방사선 치료를 거듭했다. 하지만 암은 뼈에서 복부로, 폐에서 뇌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언니랑 서울에 사는 동생은 명선이를 보기 위해 5월에 뉴욕으로 건너가서 보름 동안 있다 왔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보지도 못했다. 명선이는 8월 4일 조카 둘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너무 멀어 장례식에 참여도 못 했다. 이별 준비를 많이 해서인지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이제 독한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될 것이기에. 무엇보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통화했었다. 언니, 변산에 갔을 때 말이야. 우리가 걸었던 그 길이 생각나. 모래사장도 그립고. 동생이 말했다. 내 눈에도 그 길이 선하게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영상처럼 함께 걸었던 길이 떠올랐고, 어디서쯤 쉬었는지, 어디서쯤 사진을 찍었는지도 다 기억났다. 언니가 한신코아에 살 때 말이야, 비 오는 날 골목길 기억나지? 기억나고 말고다! 동생이 미국에 가기 전에 전주로 내려왔을 때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한여름 밤, 우리 네 자매는 우산을 집어 던지고 온 비를 다 맞으며 사람이 안 다니는 골목길을 쏘다녔다. 하늘을 보고 양팔을 쳐들고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봐, 큭큭, 거리며 웃었다. 내가 작가라는 것이 처음으로 뿌듯했다. 길치, 기계치, 몸치인 나는 그 장소, 그 일들은 소소한 것까지 잘 기억한다. 그래서 어려서 우리가 자라왔던 이야기, 막걸리를 받으러 갔던 언덕길 이야기, 뒷산에 가서 삘기를 뽑아 먹던 것까지 하루에 한 시간씩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그 부작용이었다. 어차피 2월부터 마음이 잡히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자꾸만 동생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건 언니도 서울에 있는 동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는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9월이 되어서야 미국에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도 길이라고. 명선이가 살았던 길은 길지도 않았지만 그리 평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게 말했다. 언니, 나는 사는 동안 힘들지 않았어. 언니들이 내 가족이 되어줘서 정말 행복했어. 딸이 작년에 미국에서 선생님이 되었고, 아들도 공부하고 있어서 이제야 허리를 펼 시기이니 억울할 법도 할 텐데,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엄마, 하느님이 이모가 너무 애를 썼으니 편히 살라고 데려가신 건가 봐요. 슬퍼하는 내게 아들이 위로해준 말이다. 명선이는 떠났다. 하지만 함께했던 많은 추억이 남아 있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치명자산길, 건지산길, 한옥마을길들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서 좋았던 것이라고. 남편과 문우들, 지인들과 가족이 함께 했기에 아름다웠던 것이라고. 부안 마실길이나 한신코아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또 명선이를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한걸음이 더 소중할 것 같다. 함께 걷는 이들이 있기에. /박서진(동화작가) * 200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09년 <대전일보>,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4년 <고민 있으면 다 말해>로 푸른문학상 수상. 동화책으로 <세쌍둥이 또엄마>, <남다른은 남달라>, <변신>, <숙제 해간 날>, <건수 동생, 강건미> 등.

  • 문화
  • 기고
  • 2018.06.15 14:34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우중(雨中) 단상-749번 지방도에서 - 문신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길 위에 서면 세상이 보인다고 했다지? 그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피식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이런 말도 들었던 것 같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바람이 불자 예의상 잠깐 흔들려주는 나뭇잎 같은 심정이었다랄까?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는 남다른 재주에 조금 감탄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뭐라고 한마디 거들어보고 싶다, 길에 관해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길과의 로맨스는 떠오르지 않는다. 길에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 적도 없고, 검은 숲을 파헤쳐 나만의 길을 내본 적도 없다. 몇 가지 소소한 일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늦가을 어느 날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도로를 횡단하며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르듯 으스댔었지만, 무단횡단에 따른 딱지 한 장 받아보지 못했다. 길모퉁이에 서서 어떤 여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영영 헤어져버린 기억도 있다. 그렇다고 이별의 책임을 길에게 묻고 싶지는 않다. 이별이래야 이별일 수 없는 게, 노상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발밑에 늘 길이 있어서였을까? 길에 관해 진지하게 고마워해본 적은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길에 마음을 앗겨버린 것이 2003년 무렵이다. 홀렸다고나 할까? 운명처럼, 길이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뒷목 근처에서 속삭이는 애인처럼 길은 내 오목한 발바닥을 향해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길의 애무에 끝내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 이제 나를 다 가져라! 한껏 달떠서 나는 그렇게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나는 길을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애인으로 삼은 길은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서 소양면 화심을 잇는 749번 지방도로다. 신리에서 더듬어가기 시작한 길은 적당한 경사를 이루며 오르막을 형성한다. 그 길을 사랑하는 일은,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수컷처럼, 앞만 보고 무작정 뛰는 것이다. 애인의 발등을 쓰다듬다가 정강이를 스쳐 무릎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곧장 살 오른 허벅지로 달려들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재게 발을 굴려야 한다. 신리에서 출발한 지 5분쯤이면 그리 길지 않지만 제법 가풀막진 오르막이 버티고 있다. 이제 등줄기에 땀이 배고 종아리는 딴딴하게 부풀어 오른다. 눈알 벌게지도록 씩씩거리며 단숨에, 그렇다, 멈춤 없이 단숨에 기어오르면 문득, 길은 감추어두었던 상관수원지를 애인의 허벅지 안쪽처럼 내어준다. 그 순간 휘이, 숨이 탁 트이면서 긴장하고 있던 몸의 근육들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길도 마찬가지다. 상관수원지 허리를 살포시 휘감고 도는 길은 풍만한 굴곡을 이루며 길 위에 선 사람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거추없이 덤벼들 일은 아니다. 길도 나도 서로 충분히 간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뛰는 일은 시늉으로 두고 물낯에 드리워진 산그늘의 깊이를 헤아려본다. 이런 날은 아주 맑아도 못 쓴다. 세상이 좀 더 침침해지고 사물의 빛깔들이 바짝 뭉개질듯 흐리흐리해야 연애할 맛도 난다. 주춤주춤 가랑비라도 내리면 더 좋다. 세우(細雨)에 뛰는 일은 어떤 오르가슴도 넘보지 못할 향락의 극치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사랑에는 더러 어이없는 장벽 같은 것이 덜컥 나타나기도 하는 법이니. 길과의 연애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처음과 달리 달리는 폼도 안정되고 속도도 붙어서 제법 능숙하게 애인을 대하듯 길을 밟아나가던 때였다. 준비운동을 할 때부터 아랫배가 미심쩍더니 상관수원지를 돌아가는데 기어이 탈이 나고 말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뭘 자꾸만 사달라고 졸라대는 애인처럼 아랫배가 쿡쿡 쑤셨다. 돌아갈까? 그러나 하다 말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만고의 진리가 득의하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미소의 그늘에서 피어오르는 유황불 같은 불길함을 애써 외면했지만, 오래 잊고 있던 길 위에서의 추억 하나가 강제로 소환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것은 느닷없이 내 이름을―그렇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기야, 라고 부르지 않았다.―한 음절씩 끊어서 불러대는 애인의 싸늘한 목소리처럼 뭔가 께름한 징조였다. 다섯 살? 많아야 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가로 나는 울상이 되어 길을 걷고 있었다. 집에까지는 제법 많은 걸음이 남아 있었고, 뒤편에서는 내 걸음보다 빠르게 해가 지고 있었다. 눈앞으로 길게 드리워진 내 회색 그림자를 보며, 나는 생애 최초의 비극과 맞서고 있었다. 잔뜩 숨을 참았다가 병아리 눈물처럼 조심스럽게 내쉬는 동안, 한주먹감도 안 되는 내 엉덩이는 바윗돌보다 무거웠다. 이미 나는 약간의 설사를 지린 상태였다. 배 속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잔뜩 성난 물찌똥이 출렁거렸고, 내 눈에는 흥건해진 눈물이 여차하면 미끄러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괄약근에 잔뜩 힘을 주고 걷던 길이었는데.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었다. 중학교 이학년 봄, 소풍 길도 거들어보겠다고 불쑥 끼어들었다. 아, 아득하여라. 그해 소풍 길에서 노랗게 흔들리는 환타는 귀여운 악마 같았다.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날 나는 환타가 아니라 봄볕의 환각에 취한 것이었다. 시작은 한 모금으로 미미했으나 몇 병의 환타를, 아니 봄볕을 마시고 또 마신 끝은 말 그대로 창대한 판타지였다. 찧고 까부는 동안 판타지는 서서히 악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옆구리 터진 김밥을 우겨넣고 난 뒤에 약간의 미심쩍은 기미를 느꼈으나 그때까지는 여전히 판타지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그러다가 늦은 오후, 소풍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으슥한 덤불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길은 숲을 알지 못했다. 길은 매정하게도 엄폐, 은폐할 만한 것들을 지니지 않았다. 길 위에서 나는 거의 체념하였고, 심판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최후의 눈을 감았다. 그때 아, 신이시여! 건물과 건물 사이 빈터에 누군가 버려놓은 쓰레기더미가 보였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보니 그 옆에 우북하게 돋은 쑥대가 찬란한 후광을 두른 채, 여기가 유토피아야, 라고 속삭이듯 나를 향해 손짓을 해댔다. 내가 신의 가호를 인정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에야 나는 이마를 가린 쑥대밭에 주저앉았고, 염치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어린 양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 나올 수 있었다. 몇 번 입지 않았던 팬티를 과감하게 벗어주는 것으로 쑥대밭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도래하는 미래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머리에 다시를 붙여본다. 다시 도래하는 미래. 그랬다. 악마의 재림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악마가 도래하고 있었다. 가랑가랑 비는 내리고 싸륵싸륵 배는 아파오는데, 오래전 덜 여문 내 엉덩이에 입맞춤하고 사라졌던 악마가 749번 지방도에 강림해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머릿속이 바빠졌다. 살기 위해서는 그날 새 팬티를 과감하게 내던졌던 것처럼 길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길을 달려본 사람은 안다. 길이 주는 매력을. 대장정에 나선 이에게 길은 요물이나 다름없다. 나신으로 누운 길은 그 까만 눈동자를 새침하게 내리뜨고는 가볍게 몸을 뒤채며 유혹한다. 길의 매혹에 혼미해지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고나 할까? 어느 순간 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장탄식을 토해내기도 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 아니라 걷는 자는 모두 길 왕국의 충복이 되어 길에게 투신하고 헌신한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야누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 혼미한 정신은 길의 유혹에 꿈쩍하지 않는다. 길, 너 없이는 못 한다고 굳게 맹세했던 모든 말들이 모두 부도난 허세였음이 탄로 나는 순간이다. 절세미인과 신방(新房)을 꾸미더라도 뒤가 마려우면 헛일이려니, 앞일 치르고 뒷일 봤다는 말 들어본 적 없다. 이쯤이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당당하게 파혼을 선언하고 길가 밭 언덕으로 기어올랐다. 바짓단을 내림과 동시에 쭈그리고 앉으니 마침 콩잎이 부끄러움을 가린다. 막무가내로 막아댔던 길이 터지자 밤하늘 유성우처럼 내 안의 우주가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천지창조의 순간이 이러했을 것이다. 다 끝났다. 여운처럼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야들야들한 비단 한 자락이 아기 걸음처럼 밟고 간다. 환각과 마각의 카타르시스로 부르르 몸이 떤다. 간신히 둘러보니 누리 가운데 나 하나만 외롭게 주저앉은 듯한데, 멀리 산자락들도 한 무더기씩 부려놓은 것처럼 도톰하게 섰다. 눈앞에 안개가 개니 불현듯 참담하여 그제야 엉덩이를 쏘삭이며 간질였던 것이 한낱 볼품없는 풀잎이었음을 안다. 저만치 콩잎들 사이로 껑충한 참깨 꽃이 서넛 질려 있는 것도 보인다. 문득 쓸쓸해진다. 쓸쓸함이란 이런 심정을 두고 하는 말임을 널리 선포해도 좋겠다. 콩잎 서너 장을 뜯어 쥔 채 저만치 늘어져 있는 749번 지방도를 내려다보았다. 뒤를 비우니 장딴지에 힘줄이 불끈 솟는다. 그래, 오늘은 끝장을 보자. 나는 749번 지방도에 올라탄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진 듯하다. 젖은 길은 치명적인 속살을 내보인다. 길 끝은 화심(花心)이렷다? 꽃의 속살을 아니 보지는 못할 일이니, 쓰다 남은 콩잎 한 장 움켜쥐고 우중(雨中) 질주에 속도를 높인다. 애인이여! 너,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라. /문신(시인) * 2004년 <세계일보>, <전북일보> 신춘문예(시),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동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 시집 <물가죽 북>, <곁을 주는 일>, 연구서 <현대시의 창작방법과 교육> 등.

  • 문학·출판
  • 기고
  • 2018.06.08 15:31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요사이 전주성 남문 밖은 어떠한지요 - 김저운

먼 곳만 동경하던 젊은 시절을 통과한 탓일까? 요즘은 내가 살고 있는 마을 근처를 소요하는 게 더 좋다. 낯익은 풍경과 사람들을 보면서 걷다 보면 내 눈빛도 순하고 다정해지는 것 같다. 이사를 해야겠다고 벼르던 무렵, 출퇴근길에 스치는 서학동이 내 눈에 쏙 들어왔다. 한적한 골목길 따라 따닥따닥 붙은 나지막한 집들. 담벼락 사이사이 손바닥만 한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상추 고추 시금치 같은 채소들. 분홍색 보라색의 과꽃 울타리. 노인 몇 분이 길가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한담을 나누는 모습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느 집에서나 문만 열면 하늘이 보일 것 같았다. 서학동(捿鶴洞). 학이 깃드는 마을이라니. 마을 이름도 운치를 더했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교동이 있다. 남천교만 건너면 되니 엎어지면 코 닿는 데다. 그런데도 여기 서학동은 땅값이 쌌다. 가난하고 힘없는 노인들만 살고 있어서였을까?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낑낑대며 한참 올라가는 곳도, 도심과 인접한 변두리도, 재개발지역이니 뭐니 해서 땅값이 턱없이 비쌌다. 이렇게 모두 한곳으로 몰려가는 사이, 이 동네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통에 소박한 옛 모습 그대로를 묵묵히 지녀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문화의 사각지대였다. 우리 부부는 이 동네에서 한옥 한 채를 샀다. 낡았지만 비교적 땅이 넓어 큰 마당을 가질 수 있게 된 게 가장 기뻤다. 처마 밑까지 우거진 철쭉이며 향나무 같은 것들을 모두 쳐내니 마당이 훤해졌다. 비틀어지고 썩어가는 기둥들을 튼튼한 목재로 바꾸고 기와도 새로 얹었다. 작업실까지 갖추어놓는 데 거의 일 년이 지났다. 새로 심고 가꾼 꽃나무가 제자리를 잡고 어엿한 주인의 자태를 갖추기까지 또 몇 년이 필요했다. 그 사이 평소 알고 지내던 이들이 하나둘 이사를 했다. 앞집, 옆집, 혹은 이삼십 미터를 사이에 두고 예술가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서학동예술마을이 만들어졌다. 이는 우연이지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면 너무 거창할까? 아니, 이 서학동이 우리를 찜해 놓고 있다가 불렀는지도 모른다. △서학동 골목길 담장 너머 피아노며 장구며 기타 소리가 들려오고, 동네 어르신들 쌀집 앞에 앉아 콩이야 팥이야 우기시는 건 오늘도 마찬가지다. 교육대학 학생들이 싱그럽게 떠들며 지나간 자리에 문득 정적이 찾아온다. 물감에 얼룩진 앞치마 차림의 화가가 찻잔을 들고 거리에 앉아 있는가 하면, 동네 할머니들 한옥 마루에 모여 앉아 바느질을 한다. 앞으로 있을 행사에 직접 만든 옷을 입고 패션쇼를 할 예정이란다. 칠순 팔순의 할머니들이 난생처음 패션모델로 나서면서 들떠 있는 게 역력하다. 나른한 오후 이 동네의 골목길을 나는 자주 걷는다. 시골 할머니처럼 작고 등 굽은 골목을 끼고 고만고만한 집들이 붙어 있다. 팔을 벌리면 양쪽 담장이 손끝에 닿는다. 길섶에 담배꽁초며 개똥이 있을 때엔 숨을 참으며 지나가야 하지만, 밤새 눈 내린 다음 날 점심때가 다 됐는데도 발자국 하나 없던 길을 걸은 적도 있다. 발걸음을 옮기며 상상해 본다. 저 집엔 누가 살까? 이 길을 하루에 몇이나 오갈까? 시멘트 바닥 틈새에 노랗게 핀 좀씀바귀를 들여다보고 일어서면, 이리저리 휘고 뻗어나간 골목길은 미로가 되기도 한다. 만약 빵 하나 훔친 장 발장이 여기 숨어들었더라면, 이 골목은 그를 안아 주고 품어 주었을 것만 같다. 몇 년 전 다녀온 모로코의 페스(Fes)가 떠오른다. 페스는 서민들이 사는 곳이며 시장인데 몹시 좁은 골목길이다. 저만치서 짐 실은 당나귀가 나타나면 얼른 담 쪽에 몸을 기대고 비켜서야 한다. 고대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북아프리카 최대의 관광도시란다. 21세기 서학동의 이 작은 골목길에서 나는, 8~9세기 북아프리카 패스의 골목길을 떠올려 본다. △초록바위 근처 어쩌다 시간이 좀 된다 싶을 때엔 초록바위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초록바위는, 싸전다리 건너 남부시장을 마주하고 있는 곤지산 자락 끄트머리에 있다. 바위에 늘 이끼가 끼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팝나무 군락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월 중순쯤이면 흰 꽃이 핀다. 나뭇가지 끝마다 하얀 꽃무리가 일렁이는 게, 허기진 눈으로 보면 쌀밥이나 백설기 떡으로 보였음직하다. 그래서 이밥(쌀밥)나무라 불렀단다. 그 옛날 위쪽 바위에서 처녀들이 달의 기운을 들이마시며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는데, 그 풍경이 저 꽃들의 무리와 같지 않았을까. 용감한 남정네 몇은 나무 그늘에 숨어서 훔쳐보기도 했을까. 풍류와 낭만이 있던 이곳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처연한 장소로 바뀐다. 전라 감영의 형장이었다. 바위 벼랑에서 죄인을 처형하고, 소나무 가지 끝에 잘려 나간 머리를 효수하거나 바위 밑으로 흐르는 전주천에 내던졌다고 한다. 많은 천주교인들과 동학농민군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서학동에 이사 온 후 초록바위에 얽힌 사연을 처음 알았다. 놀라웠다. 이런 장소가 까마득하게 잊히고 있다니. 그냥 묻어버릴 수 없는 역사라 생각되었다. 몇몇이 의논한 끝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진혼제를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진혼제가 삼 년째 이어져 이제 전주시와 여러 시민단체들도 함께하고 있다. △흑석골 내친김에 전주천 지류의 하나인 공수천 복개도로를 타고 흑석골로 향한다. 근처 산이 대부분 유독 검은 바위로 되어 있어 흑석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바위가 검은색을 띤 것은 흑연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라고. 그래서 실제로 주변에 탄광이 있었다는 것. 금광은 아니었어도 한때는 개발업자들이 눈독을 들였음직하다. 내가 사는 집 근처 노인들은 흑석골을 한지골이라고도 불렀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이곳에 한지공장이 많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전주 외곽에 있던 지공들이 피란을 왔다. 그런데 계곡이 깊어 일 년 내내 물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어도 여기 눌러 살면서 한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한지공장도 다 자취를 감추고, 한지골이란 이름도 차츰 잊혀져가고 있다. 흑석골행 시내버스 종점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노인이 들려준다. 삼백여 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당산나무라고. 예전에는 순창, 구이 쪽에서 전주로 오려면 보광재 너머 흑석골을 지나야 혔어. 먼 길을 힘들게 걸어와 여기 흑석골에 이르러서야 게우 한숨 돌렸당께. 다들 이 나무 아래서 쉬었지. 동네 사람들도 여기 모여 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나누거나, 크고 작은 일들도 의논혔을 것이고 말여. 지금은 외져 있지만, 전에는 여길 모르면 간첩이었당께. 내 느린 걸음은 늘 이쯤에서 멈춘다. 여기서 학산 정상까지는 가본 적이 없다. 산행을 준비하지 않고 무작정 나선 터라 계곡을 따라 한참 가다가 돌아서곤 했다. 언제 제대로 한번 정상까지 가봐야지, 맑은 물에만 산다는 갈겨니 무리도 보고, 하늘다람쥐랑 숨바꼭질도 해야지, 하면서도. 당산나무를 지나 옆길로 방향을 튼다. 여기 와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집이 있다. 남천 송수남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만년에 사셨던 곳. 한국 수묵화의 거장이자 서학동예술마을의 큰 어른이셨던 남천 선생님. 우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분을 기억할 수 있는 푯말 하나 해드리지 못했다. 생전에 손수 가꾸셨던 찔레꽃 떨기가 담장 너머로 붉디붉어 바라보는 눈시울도 물들고 말았다. 잠깐이나마 연을 맺었던 서학동 예술인들에게 흑석골은, 남천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 자체이다. 땅과 집과 사람은 같이 숨 쉬고 같은 빛깔로 새겨진다. △전주천변 서학동에 깃들어 살면서 전주천변을 자주 찾는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른 아침 운동 겸해서 나오겠지만, 나는 해 질 무렵이면 그곳에 간다. 내 작은 키에 비해 훌쩍 큰 그림자가 앞서는 걸 보면 어떤 때엔 든든하고 어떤 때엔 좀 쓸쓸해서 좋다. 천변엔 온갖 잡초와 야생화가 가득해 그야말로 생태학습장이다. 봄맞이꽃부터 시작해서 창포, 망초, 금불초, 여뀌, 쑥부쟁이 같은 꽃들이 철따라 제 존재를 알려준다. 나 여기 있어요. 봐요. 추운 겨울도 거뜬히 이겨냈다고요. 찬 서리 내리면 모두 시들고 이제 한 해의 끝을 장식하네요. 이제 일 년 후에나 만날 테니 그 동안 잘 지내세요. 안녕, 안녕. 그들과 안부를 나누면서 또는 흥얼거리며 가는 시간은, 하루 중에서 어쩌면 가장 나답게 보낸 시간인 것 같아 흐뭇할 지경이다. 전주천변의 사계 중에서도 나는 가을 길이 가장 좋다. 억새꽃 만발한 길을 소요하다 보면 내가 마치 영화의 주인공 같다. 사열하듯 줄지어 늘어선 억새꽃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몇 년 전, 이 근처에서 너구리를 본 적이 있다. 고 녀석은 억새풀 사이로 갑자기 나타났다. 놀란 것인지 멍한 것인지 나와 눈을 맞춘 건 불과 이삼 초? 그러고는 이내 억새밭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싱거웠다. 고 녀석을 보는 내 눈도 딱 그랬을 것이다. 내가 직접 목격한 적은 없지만, 전주천에는 수달도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그들 모두 안녕할까? 억새, 수크령, 갈대로 덮인 풀숲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달 뜨는 밤이면 이태백처럼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달을 굴리며 놀지 않을까. 헌데 좀 걱정이 된다. 한옥마을에 사람들이 저리도 많이 몰려오는데. 한벽당을 거쳐 승암사 아래에 이르면, 다시 되돌아올 시간이다. 그 사이 해는 기울기 시작한다. 이제 내 그림자를 응시하기보다 노을에 잠긴다. 청연루 너머 다가산 너머 노을은 그다지 멀지 않다. 한낮 은발로 눈부시던 억새꽃은, 이제 황금빛으로 염색되었다. 클림트의 <키스>가 떠오른다. <키스>가 남자와 여자 즉 인간의 것이라면, 저 광경은 억새와 노을, 그러니까 자연의 입맞춤이라고나 할까. 전주천을 사이에 둔 양쪽 길을 언젠가부터 바람 쐬는 길이라 부른다. 정말이지 더운 여름날에도 전주천 근처로 가면 시원하다. 여름밤 청연루에 와서 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나 겨울날엔 이 바람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잠깐 지나는데도 그럴진대, 옛날 전주성 남쪽에 살던 이들에게 그 바람은 어땠을까? 거처하는 곳과 의복이 오늘날처럼 추위와 더위에서 인간의 몸을 완벽히 보호해주지 못했던 그 시절, 남루한 사람들은 이 바람이 얼마나 추웠을까? 바람을 쐬면서 청연루 교각을 지나고 이제 징검다리를 건넌다. 저만치 원앙이 헤엄치고 잿빛 두루미 하나 공연히 경계의 자세로 두리번거린다. 여기에 이르면 드디어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고 물소리도 커진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머니에 바람 한 줌 넣고 귓바퀴에 물소리 같은 음표 몇 개 걸고. 차량이 빈번한 천변 한길을 건너고, 다시 일방통행 도로로 들어선다. 이 도로가 옛날 남원 가는 큰길이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또 멈칫거린다. 어딘가에 버스 정류장이 있을 것만 같다. 옛날 버스 정류장 있던 길목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이 노인은 거의 매일 이곳에 나온다.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꾸 묻는다. 왜 남원 가는 버스가 안 오지라우? 남원 가는 버스는 언제 올랑가요? 어떤 사람이 힐끗 쳐다보며 퉁명스레 대답한다. 여그선 남원 가는 버스 안 와요. 노인은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린다. 뭔 소리대여? 우리 친정이 남원인디, 여그서 버스를 타야 허는디? 왜 버스가 안 온대여? 나는 혼자 상상을 하며 주민센터 쪽 정류장이 있었을 법한 거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저기 어디쯤 빨간 우체통이,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가 어른거린다. 사연 없는 길이 어디 있을까. 우리 사는 곳 소중하지 않은 곳 어디 있을까. 그러나 내가 서학동 길에 유독 애정을 품는 것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길들이 현대화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 않고 잘 견뎌 주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소박해서 오히려 살아남은 땅. 잡목이 산을 지키듯, 묵묵히 제자리를 지킴으로써 오늘날 옛 자취를 추억하게 해 주는 서학동. 그리고 그 주변 길들. 한나절 돌아다니다 내가 사는 서학동예술마을에 다다른다. 한 바퀴 돌아오면 문득 저 있던 자리가 유독 다정히 느껴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터. 옛날엔 전주성 남문 밖이었을 서학동 몇 군데 행차에 한나절 땀은 좀 흘렸지만, 그래, 어떤 노래처럼,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는걸, 뭐. /김저운(소설가) * 1985년 <한국수필>, 1989년 <우리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소설집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 휴먼르뽀집 <오십미터 안의 사람들> 등. 전북수필상, 작가의 눈 작품상, 불꽃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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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5 15:26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물 아래 가던 길 – 곽병창

눈을 들면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걸어왔던 길이 뒤를 따른다.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었고, 이제 서둘러 늙어가는 중이다. 이 모든 일이 길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져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니 무릎으로 세상을 딛다가 문득 몸을 일으켜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의 찬란을 떠올려보라.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마침내 신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던가! 작가들에게 길은 침묵하는 신과 다르지 않다. 그 고요와 정적에 귀 기울이면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로 고통스러워하는 작가들에게 길은 아니 신은 한 번도 빛나는 영감을 선사해준 적 없지만, 작가들은 저마다의 감각으로 신의 몸을 더듬고 살펴낸 형상을 오직 인간의 언어로 형상화해냈다. 단짠에 연재되는 글들은 그렇게 길에서 얻은 영감이거나 길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마음들이다. 전북작가회의 회원들이 저마다 품고 있던 문학과 인생과 사랑과 판타지를 모았다. 신보름 화가가 삽화를 그렸다. 물 아래 가던 길 글=곽병창(극작가) 버스가 그렁거리며 고갯길을 오르다가 가까스로 숨을 돌린다. 운전사 곁에는 작은 애기 무덤만 한 엔진박스, 따뜻한 그 덮개 위에서 노인들 두엇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졸다가 눈을 번쩍 뜬다. 긴 기어 레버를 두세 번 흔들어대던 운전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액셀 페달을 밟는다. 기어 레버 아랫도리를 감쌌던 비닐 커버는 진작 다 벗겨져서 덜렁거리고 차 밑바닥도 훵 뚫려 있다. 찬바람이 휘발유 냄새랑 뒤엉켜 밑창 구멍으로 훅 끼쳐 온다. 저 아래 맨땅의 잔자갈들이 이리저리 튕겨져 나간다. 아주 오래전, 용담 가는 길이다. 진안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완행버스가 막바지 급한 언덕길을 돌아드는 중이다. 왼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 아래는 시퍼런 강물, 화난 용처럼 사시사철 우르릉거리며 돌아나가는 좁고 깊은 급류이다. 진안터미널서 정천까지 야트막한 고개 하나, 정천서 제법 가파른 산길을 타고 넘으면 모정리 정류소, 모정리서 다시 기운을 얻어 더 가파른 고갯길로 치달아 넘으면 나타나는 긴 다리 하나, 그 다리 건너 왼쪽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길이 용담읍내 가는 길, 오른쪽 평탄한 길로는 왜쟁이, 송풍리 지나 금산 가는 길이다. 그 길, 삼거리에서 오로지 용담읍내만을 가기 위해 내어놓은 버스 길, 금산을 가려면 그 낭떠러지 굽이를 다시 되짚어 나와야 했던 그 길은, 전주서 찾아가려면 종일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차가 마주 오지 않기를 빌어야 하는 외길이었다. 내가 탄 버스가 용담 들머리의 낭떠러지에 간신히 올라서서 기어를 바꾸고 그 아슬아슬한 굽이를 돌아가는 그 시간은, 그래서 늘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차가 그 길 위에 올라서서 흔들거리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늘 어두웠다. 그러지 않아도 지치고 쓸쓸한 길이었다. 멀리 태고정 쪽에서부터 길게 늘인 석양빛이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 검푸른 물굽이에 어리어 반짝이고 있었다. 석양에 물든 채, 고갯길 저 아래로 가까스로 나타나는 용담읍내를 내려다보며 나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바닥이 군데군데 뚫린 버스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은 석양이었다. 용담읍내는 언제나 어둡고 음울한 모습이었다. 반쯤 석양빛을 등지고 저물어가는 조그만 읍내의 집이며 골목들-. 뿌리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견디고 있는 듯한 그 풍경이 나는 싫었다. 짙고 깊게 휘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마치 사로잡힌 듯 안겨 있는 낮은 지붕들-. 몇은 함석지붕이었고 몇은 슬래브식 지붕, 그리고 차부(버스정류소)에서 먼 외곽에는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그 낮게 웅크린 마을은 아무리 보아도 정겨워지지가 않았다. 부모님이 살고 있었고 한 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마을 뒷산 기슭에 오래된 친구처럼 서 있었지만 나는 그 마을이 낯설었다. 늘 그늘이 진, 해가 넘어가고 있는 동네, 그 골목 어딘가에서 마흔 살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부에는 제법 많은 버스들이 뒤엉켜서 들고 나느라 분주했고 구리스로 범벅이 된 차부 부근의 땅은 지저분했다. 그 검은 흙들로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음식점, 이발소, 다방, 점방이 해거름 술꾼들을 기다리고, 차부의 운전사들, 차장들은 매표소 앞 나무 의자에서 왁자하게 웃거나 욕을 해댔다.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술집이거나 다방이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괜히 형님이라 부르던 차장들 틈에서, 아버지는 나를 기다렸다. 멀미에 지쳐 파리한 얼굴로 높은 버스 계단에서 부려지듯 차부 땅바닥에 내려서면 아버지가 어디선가 병창- 하고 외치며 다가왔다. 안아주셨을까, 까칠한 수염 얼굴로 내 볼을 비비셨을까, 그 순간은 기억에 없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구리스 질컥이는 차부 옆길을 따라 골목 끝의 애저집 <흥성옥>엘 종종 가셨다. 접시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게 잘 삶겨 나온, 그 저금통만 한 새끼 돼지들의 뽀얀 맨살-. 초등학교 내내 객지 생활에 지쳐 허약했던 나는, 허겁지겁 그 어린 것들을 잘도 먹어치웠다. <흥성옥>은 늘 어른들로 북적였고 나는 얼른 먹고 가야 하는 어린 것이었기에 아버지보다 먼저 나왔을 것이다. 우연히, 날마다 우연히 만나는 아버지의 친구들은, 또 아버지를 잡고 한 잔 더 했을 것이고, 나는 읍내 한가운데 난 큰 길을 따라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그때쯤이면 태고정 쪽에서 비춰오던 석양빛도 다 사위어들고, 그 뒤 깊은 골짜기에서 나온 어둠이 마치 거대한 동물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화염처럼 온 동네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읍내에서 찻길 반대편으로 들어가는 더 깊은 안쪽, 시퍼런 물굽이가 돌아 나오는 그 골짜기의 초입에 태고정(太古亭)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이 분명해 보이던 그 낡고 외로운 정자의 이름은 왜 하필 태고정이었을까? 저 물굽이는 도대체 얼마나 더 깊은 산골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우체국 지나고 면사무소 지나고 의용소방대를 지나는 동안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그 동네가, 고향도 아니고 타향도 아닌 그 동네가 자꾸 궁금했다. 그 자갈 많던 읍내 안길은 왜 자꾸만 내 발걸음을 튕겨내던지, 내 걸음은 그 길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꾸 허공을 딛는 것만 같았다. 우체국 집 딸인지 소방대장 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전 한 학기를 다녔던 용담국민학교서 잠시 친해졌다 생각했던, 그러나 끝내 제대로 눈길 한 번도 못 마주쳐본 숙경인가 하던 여자아이 속마음도 갈수록 알쏭달쏭했다. 그리고 태고정이랑 그 뒤를 우르릉거리며 돌아 나가던 물소리는 점점 더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 시퍼런 물의 고향이나 늙은 정자의 내력을 채 알아채기도 전에, 숙경이 속마음도 제대로 알아채기 전에, 우리 집은 용담을 떠났다. 용담국민학교에 있던 아버지가 송풍국민학교로 전근을 가신 탓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늘 그 낭떠러지 굽잇길의 석양빛을 받으며 용담 차부를 돌아 나와야 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천지가 개벽을 했다. 금산 쪽으로 왜정이 모퉁이를 길게 돌아 나가서 회룡마을 가는 산굽이에 거대한 댐이 들어서고 정천부터 송풍리 사이 산천은 다 물에 잠겨 버렸다. 용이 사는 연못이라 용담이라 붙였다던 예쁜 이름은, 이제는 거대한 호수의 이름이 되었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죽어도 못 떠난다 울부짖던 이들도 하릴없이 고향을 떠났고, 댐만 생기면 일확천금 부자 될 줄 알았던 이들도 별 부자 못 된 채 고향을 등졌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언저리에 집 짓고 살고 누군가는 문중 납골당을 더 높은 곳으로 옮겼다. 읍내 가던 낭떠러지 굽잇길도 물에 잠겼고 그 대신 말쑥한 드라이브 코스 길이 호수 위를 가로지른다. 그 길 위로 벌초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면 팔십이 훌쩍 넘은 아버지는 조수석에서 자꾸만 눈가를 짓누르신다. 이제 그 낭떠러지 버스 길 아래 깊고 검푸르기만 하던 그 물굽이는 온데간데없다. 용담 차부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는 동안 풍겨오던 짙은 구리스 냄새는, 천지 사방 떠돌던 차장들의 악다구니 소리와 함께 사라져갔다. 나는 그때 그 낭떠러지 길에서, 구리스 향기 코를 찌르던 차부 길에서 몇 걸음이나 멀리 왔을까? 되돌아보니 내 발걸음은 여전히 그때 그 길 언저리서 허공만 휘젓고 있고, 근원을 알 수 없어 무섭기만 하던 그 골짜기며 물굽이들은, 더 깊은 삶의 심연(深淵)이 되어 여전히 내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용담호 그득한 물은 모를 것이다. 저 아래 차부 흙 마당에서 아직도 구리스가 술술 풀려나오는지, 흥성옥이며 골목 다방을 기웃거리던 사내들은 어디쯤에서 해 질 녘 술잔을 기울이는지, 용담초등학교 뒷산 중턱까지 차오른 물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때 내가 낯설기만 했던 우리 동네 용담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듯이-. 해만 넘어가면 귀신 나올 듯 무섭기만 하던 태고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금은 호숫가 관광단지로 옮겨 앉았다. 전혀 태고정 같지 않은 모습으로, 뽕짝 소리 자지러지는 휴게소 곁에서, 아파트 노인당의 노인처럼 쭈뼛쭈뼛 서 있을 뿐이다. 면사무소 따라 송풍리로 옮겨간 <흥성옥>에서는 이제 애저를 팔지 않는다. 그래도, 저 물 아래 사람들 오가던 그 길,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떠나간 이들의 어지러운 꿈자리마다, 물 아래 저 길로 그때 그 사람들 다시 모여들어서, 한 잔만 더 하자고 보챌 것이다. 오늘도 붐비는 저 꿈자리 길 위로, 석양은 또 찰랑찰랑 울먹이며, 마지못해 비스듬히 지고 있을 것이다. * 곽병창: 극작가, 연출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희곡집 『강 건너 안개 숲』, 『필례, 미친 꽃』, 평론집 『연희, 극, 축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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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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