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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장제(葬制)문화

인간에게 죽음이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을 영혼불멸 사상으로 승화하여 영혼은 또 다른 세계로 지속된다고 믿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후에 영혼의 안식처가 되는 무덤의 축조에는 당시 사회생활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인간의 생각이나 풍습 등을 바탕으로 묘제나 장제가 형성되기 때문에 전통성과 보수성이 매우 강한 고고학 유적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마한 장례 풍속의 한 단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들의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은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담는 용기로 사용되는 널이며, 곽은 관을 보호하기 위해 덧싸는 덧널을 일컫는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장자(莊子)잡편(雜篇)』에 보면 천자는 관곽을 일곱 겹으로, 제후는 다섯 겹, 대부는 세 겹, 선비는 두 겹으로 관곽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곧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관곽의 중첩 사용에 제한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관곽제도는 묘장제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상(商)주(周)시대를 거쳐 춘추시대에 등급이 분명한 제도로 정착되었다. 이후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관곽제도는 쇠퇴해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관이 사용되었던 토광묘 유적은 만경강유역을 중심으로 익산지역과 완주전주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마한을 성립한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이다. 특히 익산지역의 토광묘 유적은 고조선 준왕이 이주해 왔다는 문헌기록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묘제는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집단에 의해 새롭게 축조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 그리고 세형동검이나 동경을 세트로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토광묘의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매몰토 단면 토층을 통해 무목관, 목관, 목곽, 통나무 목관 등이 사용되었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서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진한이나 변한지역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토광묘 내부구조가 변화되는데, 곧 목관 단계에서 목곽을 사용하는 단계로 발전해 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토광 내에 목곽의 등장은 진변한 사회에 지배 계층의 출현과 관련된 증거로서 사회의 발전의 척도로 해석되고 있다. 한편 마한 사회에서는 토광묘 다음 단계에 유행하는 대표적인 묘제로서 주구묘(분구묘)를 들 수 있는데, 역시 주매장주체부는 주로 토광을 채용하고 있지만, 목곽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삼한사회에서는 토광묘라는 공통적인 묘제를 채용하고 있었지만 내부구조의 변화과정에서 보이는 차이점은 곧 마한과 진변한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완규 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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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2 17:25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 사람들의 유별난 옥(玉) 사랑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마한 사람들은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기도 하지만, 금과 은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라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보면 마한유적 가운데 특히 분묘유적에서 다량의 옥이 부장되어 있기 때문에 문헌기록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마한 사람들은 평소에 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옷과 옥으로 몸치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후에도 부장해 주었으니 마한 사람들의 옥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마한 성립기로 추정되는 부여 합송리 유적에서 철기와 공반되어 대롱옥이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옥은 중국에서 철기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동시대의 완주 갈동과 신풍리에서 납바륨 유리인 관옥, 벽옥, 환옥이 출토 되었고, 최근에는 출토 예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마한 전기에 해당하는 주구묘 단계에서 백제 영역화 이후 축조된 후기의 대형 분구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량의 옥이 부장되고 있어서 마한 전시기를 통해 전통적으로 옥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소개하면 3~4세기 무렵의 고창지역의 만동유적과 남산리 분구묘에서도 다량의 옥이 발견되었다. 5세기를 중심연대로 하는 완주 상운리 마한 분구묘에서는 전체 160기의 매장시설의 46%에 해당하는 74기의 매장시설에서 6000여 점의 옥이 출토되었다. 마한문화의 전통이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 지속된 영산강유역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5세기 무렵의 대형 분구묘인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2700여 점, 정촌 고분에서 1117여 점의 옥이 부장되어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마한 사람들의 옥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옥을 만든 재료는 수정, 마노, 호박, 돌, 흙 등 광물질과 유리를 이용하고 있는데, 유리제품은 적색, 녹색, 황색. 주황색, 무색 등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한편 그 형태에 따라 둥근 옥,대롱 옥, 굽은 옥, 대추모양 옥 등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옥을 제작하는 기술은 첫째, 틀에 찍어내는 방법, 둘째, 유리 용액에 봉을 사용하여 감아 말아 만드는 방법, 셋째, 유리를 불어서 유리관을 만든 후 잘라 만드는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익산 송학동 마한 집자리 유적에서는 거푸집이 수습되어 실제 생활에서 옥을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거품집은 연질의 토제품이며 평면형태는 방형에 가깝고 상면은 볼록하고 뒷면은 약간 오목한 편이다. 상면에는 테두리를 제외하고 직경 0.3cm의 원공이 0.2cm의 간격으로 열을 지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는 0.1cm 미만의 구멍이 관통되어 있다. 그 내부에서는 옥 찌꺼기가 일부 남아 있어 옥을 녹여 찍어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1.19 17:2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풍속

풍속의 사전적 의미는 옛날부터 그 사회에 행하여 온 사람의 생활 전방에 걸친 습관이라 정의 되어 있다. 우리는 한 사회 속에서 전해오는 습관이란 종족이나 국가라는 틀 속에서 공동체적인 행위를 통해 생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에 의해서 개인은 공동체에 귀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풍속은 한 사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 다양한 색깔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한의 풍속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나 「후한서」에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서 마한 풍속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먼저 일상생활에서 풍속을 살펴보면 기강이 흐려서 각 나라의 도읍에는 비록 우두머리(主帥)가 있지만 읍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예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마한의 집자리 발굴조사를 통해서 보면 대규모의 취락에서 개별 집자리의 규모는 균등한 편이며, 특히 그 가운데에서 뚜렷하게 규모가 커서 지배자의 거처라 할 만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출토유물을 보더라도 특정 집자리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권위의 상징인 위세품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집단 내에서 서열화의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의 눈에 비친 기록처럼 마한사회가 예의가 없고 무질서한 사회라기보다는 마한 사회의 특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곧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혈연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지배와 피지배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협동이 필요한 평등한 공동체 사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거처는 초가에 토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살며 장유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수의 구덩이 유구가 군집을 이루고 발견되고 있는데, 입구는 원형과 방형이 주를 이루고 그 폭은 1~2m이며, 깊이는 2~3m로서 다양하다. 특히 2001년 사적 제 433호로 지정된 공주 장선리 토실유적에서 39기가 발견되어 마한의 집자리 구조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되는 생활용 토기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마한인의 거처인 토실이라는 결론에 접근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는 익산 왕궁 사덕유적에서 마한에서 백제시대에 걸치는 집자리 105기와 토실유구 124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토실은 계절적인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었던 주거시설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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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2 16:40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상징 새모양 토기

고대 국가의 궁전이나 종교 건축에서 기둥이나 기와 등 각종 부재에 다양한 동물 모양으로 장식하여 권위나 신앙적 측면을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 예들을 살필 수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분묘나 생활유적에서 동물 모양의 유물들이 출토되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사상이나 신앙적인 면을 엿 볼수 있게 한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러진 삼족오(三足烏)는 고구려인들의 세계관을,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오리모양 토기는 그들의 내세관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마한의 분묘나 집자리에서도 새를 모티브로 만든 새모양 토기(鳥形土器)가 기원전후에서 5세기의 유적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 토기는 분묘나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예에서 보면 형태상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아 일상용과 매장용으로 구분해서 특별히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마한 전시기를 통해 새모양 토기가 상징적인 의례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서 마한을 상징하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새모양 토기의 형태를 보면 새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은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로 새의 등위에는 물을 채우는 주입구(注入口)로서 작게 돌출되었다. 주구의 반대편에는 약간 치켜세워 올려 좌우 대칭처럼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손잡이 기능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부에는 빈 공간을 마련하여 물이나 술 같은 유체를 채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른 시기의 것들은 새의 모양에 충실하고 있으나 점차 오늘날 주전자 형태로 변화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보물 1823호로 지정된 「농경문청동기」는 따비와 같은 농기구를 이용하여 땅을 일구는 청동기 시대의 농경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물의 뒷면에는 좌우에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새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자로서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한 새는 씨앗을 가져다주는 곡령으로서 의미뿐만 아니라 농사의 풍요까지도 지켜주는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한의 솟대위에는 새 장식을 올려놓아 하늘과 인간세계를 매개하는 존재로 새를 인식하고 있었다. 마한 사람들은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 자리잡고 농경을 생업경제 기반으로 생활을 영위해 오면서 수확의 풍요로움을 내려준 하늘에 감사하는 소박함을 새모양 토기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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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5 18:20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집자리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구간내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마한 분묘유적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한 사람들의 집자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고고학 연구에서 죽음의 공간인 분묘와 삶의 공간인 집자리는 매우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분묘를 통해서 축조 집단의 계통을 살필 수 있고, 집자리를 통해서는 당시의 자연환경이나 기후, 그리고 생업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골의 자연부락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마한 사람들도 삶의 터전인 취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집단적으로 분묘를 축조하고 있어 삶과 죽음의 끈끈한 연결 고리 속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아마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하면서 농업을 주 생업으로 삼았던 마한 사람들의 혈연 중심적인 사회적 현상이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마한 사람들이 선호했던 집자리의 위치는 낮은 구릉의 남동쪽의 사면을 선택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고, 유구의 중첩이 이루어진 곳도 많아 오랜 기간 동안 정착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는 대부분 나지막하게 기반토를 판 소위 움집형태인데, 청동기시대 집자리에 비해 현저히 낮게 파서 축조하고 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릉의 사면을 파서 집자리를 축조하고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에서는 높은 쪽의 벽면은 잘 남아 있는 반면에 낮은 쪽의 벽면은 유실된 경우가 많았다. 마한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방형이 대부분이며 한쪽 벽에 입구처럼 돌출된 예도 있다. 그 규모는 소형에서 대형까지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각 변이 57m 정도로서 45인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한편 한 변이 11m이상 되는 대형도 발견되는데 이는 공동의 집회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시설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은 네 벽의 하부를 따라서 도랑을 두르고 밖으로 출구를 두고 있는데, 이는 집 내부의 습기를 배출하기 위한 시설이다. 또한 지붕을 결구하기 위해서 내부에는 기둥을 세웠던 구덩이가 노출되기도 하는데, 방형을 이루고 설치된 네 개의 기둥을 세웠던 방식은 마한 특유의 구조로서 알려져 있다. 취사시설과 관련된 부엌자리는 한쪽 벽에 붙여 시설되어 있고, 솥을 받칠 수 있도록 장란형토기를 뒤엎어서 두 개를 세운 받침이 발견되고 있다. 때로는 부엌 아궁이 턱받침 토제품이 발견되기도 한다. 마한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주로 생활용 토기로서 귀때토기나 장란형토기, 시루, 단경호, 이중구연토기 등 다양한 기종이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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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9 18:5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을 읽어준 서해안 고속도로

최완규 원광대학교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대규모 국토개발에 앞서 필수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화유적 조사는 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생산하게 된다. 이렇게 얻어진 자료는 문헌에 기록되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사회와 문화를 재구성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초적인 연구자료로 활용된다. 서해안고속도로는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을 기점으로 전남과 전북, 충남과 경기 등의 지역을 서해 연안을 따라 건설된 총연장 340.8km로서 고속도로로서 1990년 12월에 착공하여 2001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고속도로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고 있지만, 서해안 고속도로는 서해안을 관통하는 지리적 명칭을 갖고 있다. 한반도 서해안 지역은 높은 산맥에 막힘없이 경기에서 전남 무안까지 내달릴수 있는 노년기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구간내 문화유적 조사는 마한의 옛 영역을 관통해서 이루어지는 샘플조사와 같은 의미가 있어서 마한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기회가 되었다. 전북지역을 통과하는 총연장 77.5km에 대한 지표조사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1997년에 이루어졌는데, 무려 50개소에서 유물 산포지가 확인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북지역의 각 대학 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 등이 연합으로 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2~3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마한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점에서 주목되는 결과들이 도출되었다. 먼저 분구묘(주구묘)로 대표되는 마한 분묘들이 서해안을 따라서 잇달아 발견되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지 않아 그 성격에 대한 많은 의문이 있었는데, 고창 성남리에서 주매장부로서 토광묘와 주구나 대상부에 옹관이 안치된 양상을 통해 혈연관계를 기본으로 축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개별 주구묘들이 또 다른 주구묘와 인접하거나 중첩되고 있어서 대형 분구묘로 변화 발전하는 이른 단계의 양상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구묘들의 평면 형태는 각 지역마다 특징을 달리하고 있어서 54개국으로 구성된 마한 소국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출토유물에서 과거 백제토기로 분류되었던 이중구연토기와 양이부호 등은 마한 고유의 토기임이 밝혀져 마한과 백제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특히 다량의 옥류가 부장되어 있어서 마한인들은 금은보화보다 구슬이나 옥을 소중히 여겼다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서해안고속도로 구간의 조사는 마한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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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2 17:51

[최완규 교수의 '마한 이야기'] 마한문화의 인식

최완규 원광대학교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요즘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전시유물의 이해를 돕는 설명 패널과 유물 명패에서 어렵지 않게 마한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나주에 자리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를 정리하고 발굴조사에서 수집된 자료를 중심으로 건립된 박물관이라는 점은 격세지감마저 들게 한다. 사실 지금처럼 명쾌하게 역사적 정치체로서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영산강 유역의 마한문화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대형 옹관마저도 1990년대 초까지는 광주 박물관 전시유물의 명패에 「백제시대 5~6세기」라 쓰여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90년대 초반까지 마한과 백제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 학계의 연구가 미미한 수준의 현실을 그대로 방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마한은 백제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복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병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대나무와 죽순에 비교될 정도로 두 정치체를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쯔이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곧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에 심취했던 그는 무덤 주위에 들러진 도랑을 근거로 왜인의 무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9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재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일인 학자들의 발굴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정보를 구체적으로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마한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은 1970~80년대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의 설립과 호남지역 대학교에 고고학 관련 학과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게 된다. 국립광주박물관과 각 대학 박물관이 주동이 되어 영산강유역의 영암과 나주일대의 대형 옹관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 지역의 문화양상이 백제문화는 뚜렷이 구분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별로 역사문화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에 건설된 서해안고속도로 구간에 대한 문화유적 조사는 비로소 마한문화의 정체성을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곧 마한의 옛 영역에서 서해안을 따라서 이루어진 조사는 마치 마한 전역에 대한 샘플 조사와 같은 효과를 보여 백제문화와 구분되는 마한문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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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5 18:17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 연구의 시각

최완규 원광대학교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한국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마한에 대해서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마한을 종족의 명칭이나 문화계통적인 의미로 보는 시각이며, 둘째는 지연적, 정치 사회적으로 통합된 정치체로 보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 마한을 바라본 대표적인 연구자는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인데, 그는 「전후삼한고」(1925)와 「조선상고사」(1931)에서 삼한을 전삼한과 후삼한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전후 삼한의 구분은 고조선 준왕의 남쪽으로 이주 시점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전삼한은 단군조선이 신(眞)조선 불(番)조선 말(馬)조선으로 분화한 것이며, 말조선을 제외한 위치는 중국의 요서와 요동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말조선은 한반도의 기자조선으로 마한의 전신으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마한을 비롯한 한(韓)은 북쪽의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종족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편 이병도는 준왕의 남천으로 비로소 남한지방에 한이라는 종족명이 등장하고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남한 전체를 한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어서 신채호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후자의 관점은 지연적인 또는 사회적인 단위의 정치체로 보는 시각으로 최근 연구자들의 통설이 되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을 소국연맹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거는 『삼국지』나 『후한서』에서 고조선 준왕의 남천지를 韓地로 특정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는 준왕의 남천 이전부터 한이 성립되어 있었고, 이것이 곧 마한이라는 것이다. 곧 북방에서 종족이 이동하여 한을 성립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선주 토착 집단들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로 韓이 대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넓게 퍼져 있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문화권이 형성되며, 한 소국들이 연맹체를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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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8 18:15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실체를 찾아서

※ 앞으로 매주 수요일 안성덕 시인의 감성 터치 대신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가 연재 됩니다. 최완규 원광대학교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한국 고대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은 당시의 문헌기록이 아주 소략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마한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측 사서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문헌자료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재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마한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나아감에 있어서 문헌자료도 활용하겠지만, 주로 고고학적인 자료를 인용하여 마한의 실체에 접근하도록 할 것이다.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경기충청전라지역을 아우르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 해당한다. 마한은 한강 이남에 자리잡고 있었던 진한변한과 더불어 삼한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 중 마한이 맹주로서 삼한사회의 리더급에 해당하는 정치적 위상을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측 역사서인 『삼국지』와 『후한서』를 보면 마한은 크고 작은 54개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국의 국명이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 지방자치단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두 사서에는 마한 사람들의 제천의식이나 풍습, 대외관계까지도 기술하고 있어 마한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서에는 마한이 언제 개국했으며 언제 멸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한의 성립 시기와 소멸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마한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중국의 동북지방으로부터 철기문화의 유입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체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고 문헌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그 시기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마한의 소멸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를 참조하여 369년에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6세기까지 영산강유역에서는 마한 전통이 지속되고 있어 소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결국 마한은 한국 고대사에서 7800여년의 시간성을 갖는 매우 중요한 정치체임을 틀림없다. /최완규(원광대학교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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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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