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생의 모든 단계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유소년기는 부모형제와 함께, 청소년기는 친구들과 함께, 성인이 되어서도 직장의 동료·배우자·단체 등 관련된 모든 사람과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 돈키호테의 성격으로 절해고도에서 외롭게 살아간다면 그는 과연 생의 가치를 어디에서 느끼며 또 생을 연장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인간관계는 사회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타인과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즉 타인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가치·능력·행복의 척도·변화의 불가피성을 깨닫게 되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간다.
타인의 인격과 능력을 존중할 때 나 또한 그들로부터 참다운 인간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도덕과 신의가 무너지고, 확실한 논리를 피해 가는 불확실한 사회, 정직한 사람들이 바보 같은 대우를 받을 때,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져 갈 때, 어딘가 잘못 짜여진 이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인간의 가치판단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나없이 이런저런 약속을 하며 살아간다. 약속을 잘 지킬 수도 있고, 때로는 약속을 어겨 상대방을 속상하게 하는 때도 있다. 약속을 할 때는 경중(輕重)을 떠나 정말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가벼운 생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어서, 또는 그때의 상황 때문에 그냥 약속한 것이지 꼭 중요해서만은 아니었더라고 하자. 그런데 상대방은 중요하고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잘못을 저지르며,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지키기 어려운 일이기에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리라. 그래서 어떤 약속이든 잘 지킬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며, 상대방에게 신뢰를 받고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중요한 요체를 몸소 얻어가며 인간들의 삶의 가치판단 기준에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 할 바에는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인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약속이라는 단어와 함께 성립된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될 것 같지도 않은 약속을 하여 세인들의 혹평을 받으며, 그 중의 훌륭한 분들도 한 무리로 취급받아 나쁜 인상을 받는다. 남녀간의 사랑, 친구들과의 우정, 사업자들간의 거래, 금전거래, 부모자식간의 혈연, 법질서, 공중도덕을 지키는 약속 등 수많은 약속들이 허무하게 깨어져 갈 때 상대편만 기분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신뢰를 잃어버려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이다. 무리하게 한 약속이나, 아니면 어떤 요청을 받았다면 상대방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분명하게 미루거나 또는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괴로움이나 부담감을 덜어내야 할 것이다.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사람 그는 곧 인격자다.
자기의 명예를 지키고 본분을 다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와의 약속이며, 사회인으로 제몫을 다하는 것이다. 지난 6월말에 종영한‘허준’이라는 역사 드라마가 수많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이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리와 인정, 그리고 의사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신뢰감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도 권력과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던 당찬 모습과 이기주의자들의 정파간 싸움질 속에서도 올곧은 신념으로 인간의 본분을 지켜낸 허준은 의술인이기에 앞서 하나의 인격체, 곧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들의 ‘진짜 영웅’으로 비춰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仁)사상을 외치며 바른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공자가 본 세상은 저마다의 야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제후들의 전쟁과 그 속에서 도탄에 빠진 민생들이었다. 공자는 이런 모습들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것은 모두가 각자의 본분(本分)을 다하지 못한데서 질서가 무너지고, 인심이 야박해지며, 자신들의 이익과 욕구만을 충족시키려는 벼슬아치들의 하극상의 풍조가 천하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래서 공자는 제발 모두들 ‘분수를 지켜라’고 외쳤다. 그 유명한 정명론(正名論)이다. 공자 나이 35세 때 제(齊)의 경공(景公)이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느냐고 묻자‘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君君) 신하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신하노릇을 하고 (臣臣) 아비는 부모로서의 의무와 사랑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父父) 자식은 자식된 도리를 다해서 아들다워야 한다(子子). (출전 논어 안연편)’고 말했다.
사람 각각의 말에 진실이 담기고, 행동은 신뢰에 차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 갈 때 더불어 사는 밝은 사회가 다가올 것이다.
/김형중(벽성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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