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6-03-18 15:25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경제 chevron_right 경제일반
일반기사

[우리 이장님] 부안읍 신덕마을 김성옥씨

 

 

40여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안읍 모산리 신덕마을을 지켜온 이마을 이장 김성옥씨(76).

 

1960년대 초반 혈기 왕성한 젊음을 밑바탕으로 참사 부터 시작한 이마을 지킴이 생활은 해를 거듭해 어느덧 세월을 훌쩍 뛰어 넘었다.

 

어림잡아 50여 가구가 모여사는 이마을은 마을 어귀에서 부터 사람의 흔적이 닿는 구석구석 까지 좀체로 쓰레기더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장직을 맡고 난후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던 김씨의 마을 쓸기가 수십여년간 지속되면서 닫혀 있던 주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려진 때문.

 

김씨의 성실함과 적극성이 주민들로 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자율적으로 마을 환경조성에 힘쓰는 등 이마을에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 오랜기간 김씨를 위주로 뭉쳐진 마을주민들은 서로를 위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마치 한가족 같은 분위기를 품어내고 있다.

 

궂은 일에서 부터 애사나 경사에 이르기 까지 김씨가 챙겨야 했던 마을 일이 부락민들 전체로 확산되면서 공동체를 형성, 마을 번영회를 통해 잘 소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마을 안팎을 쓸어내면서 닳아 없어진 대빗자루만도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 때문에 김씨는 자구책으로 빗자루를 직접 만들고 있으며 대빗자루를 엮어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만큼 하루 일과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서 일까.
집 한켠에 보관된 수십여게에 달하는 빗자루는 오랜기간 김씨가 쏟아낸 땀과 인생의 추억이 흠뻑 담겨 있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새벽 3시. 꼭두 새벽부터 시작되던 마을 일은 요즘 동네 개들이 짖는 바람에 다소 늦게 시작된다. 그가 움직일때면 여기저기서 짖어대는 개소리에 마을민들이 새벽잠을 설치기 때문이다. 관내 5백1명의 이장중 최고령의 나이에 접어든 김성옥씨.

 

그러나 차림세와 얼굴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은 노령에도 불구 언듯 보아서는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부인 최덕임여사의 한결같은 내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탱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60년대 후반 벼 장려품종인 노풍을 마을민들에게 보급했다가 목도열병으로 벼가 고사하면서 피해농가가 발생해 제일 힘들었다는 김씨. 동네의 거목으로 불려지기 까지 꼭 두번 울었다는 김씨는 지난 1972년 부안에서 제일먼저 시작한 새마을사업을 그중 하나로 손꼽고 있다.

 

당시 신덕마을 진입로는 주택이며 울타리가 다닥다닥 붙어있어 지게 하나를 지고 겨우 빠져나갈 정도. 이때문에 마을민들에게 신작로 같은 넓은 진입로는 지역숙원이요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30대 이장으로 시작한 신덕리 새마을사업은 그리 쉽지많은 않아 담장이며 울타리며 진입로를 넓히기 위한 철거작업은 마을 유지에서 부터 원로에 이르기 까지 강한 반발에 부딛히면서 주춤거리기 일쑤.

 

맨손으로 시작한 새마을사업이 마을 유지들의 반발에 밀릴때면 ‘나혼자 먹고 살라고 그런것이 아니여’‘나 이장직 그만 두겠다’는 등 애써 참아내다 뱉어내는 으름장은 김씨가 해결책으로 써먹던 해묵은 수법.

 

그런 때문인듯 당시 새마을사업이 완공되면서 들어선 폭 3m규모의 넓다란 진입로는 혈기왕성했던 젊은 이장시절 김씨의 피땀이 깃들어 있다.

 

이와 함께 동네 자체가 갯벌땅으로 형성된 이지역은 식수원을 개발해도 염기가 스미면서 물이 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지역.

 

그런 까닭에 이마을 지역민들이면 이웃마을에서 물 길어나르는 일쯤은 누구나가 겪어내야할 커다란 고충이었다.

 

우물을 파고 그안에 숯이며 자갈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샘물을 여과해서 먹던 시절 고질적인 식수원 해결을 위해 쏟아낸 김이장의 열정은 마을사람 누구나가 감사하게 느끼고 있는 한대목이다.

 

백산중고등학교 뒤 대산마을 수원지에 연결해 놓은 호스가 수압이나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갈때면 호스를 연결하는 일은 매번 김씨의 차지.

 

‘물 안나온다’ 전화라도 오는 날이면 두렵게 느껴졌다는 암울했던 그시절.
왜정시대 당시 이장의 한마디는 곳 법과도 같을 만큼 막강했다는 그시절을 보냈다는 김씨는 초로의 길에서 어느덧 신덕마을 대부이자 마을 살림꾼으로 통하고 있다.

 

모산리 신덕마을 유래

 

부안읍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4㎞지점에 위치한 부안군 모산리 신덕(新德)마을은 전형적 논농사마을. 47가구 1백5명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마을은 마을의 지질이 해성충적토(海成沖積土)로서 당시 갈대만이 무성한 허허벌판의 황무지였다.

 

일제시대 때 동양척식회사가 이일대를 개척하고 경작 희망농가의 정착을 주도함에 따라 지난 1926년에 경향각지에서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집단화를 이루었다.

 

15가구로 구성된 이마을은 동척(東拓) 이민촌이라 칭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된 것. 당시의 생활환경은 신설지구인 개간지라서 수확량은 적었고 식수는 생수가 아닌 건수였으나 생할하기가 곤란했던 마을.

 

한사람이 하루종일 벼를 베어보았자 바작으로 한아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농경지가 동진수리조합 관내라고는 하나 수로의 최말단인데다가 수리불완전답으로 피해가 극심한 지역.

 

1944년 일제 말엽에 마을의 농경지에 경지정리 사업을 전개하였으나 대동아전쟁의 여파로 미진한 단계에서 해방을 맞이 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배일의식이 투철한 주민들로서는 동척이라는 마을 호칭을 없애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신 큰 덕으로 개칭했다.

 

1958년 청소년들의 기강이 해이 되어감을 보고 십여인이 발기 번영회를 조직, 임원회에서 기강을 바로잡고 예의범절의 지도와 향약준수를 결의하여 마을 번영회 창립을 보았던 것.
기금조성에 있어서도 유지들이 정조이천이십육근(正祖貳阡貳拾六斤)을 모아서 저축하게 됨으로써 마을이 날로 발전해가고 회원간의 애경지사는 자기 자시의 일처럼 상부상조하는 미풍과 단체심이 강하여 타마을의 모범이 되었다.

 

마을안길 확장공사 5백m 진입로 1천m 지붕개량 35동 담장개량 전세대를 실시함은 물론 좁은 골목을 훤하게 확장하여 경운기 및 자동차가 집집마다 드나드는 대혁시을 이루었다.
농지가 개간된 지역으로 식수를 건수로 근근히 생활해오다 1973년 대대적인 간이 상수도 사업을 추진, 수원지를 8㎞떨어진 백산면 대산마을에 확보하여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게 됨으로써 집집마다 위생적인 수도물을 공급하게 되었다.

 

더우기 이마을은 정부의 중농정책에 힘입어 1981년 맨 먼저 기계화 영농단지로 선정되어 지금은 1백%기계로 농사를 짓는 마을이 됐다. 이제는 옛날의 이민촌의 서러움이 사라지고 부안에서 농업소득이 제일 높은 살기좋은 마을이 됐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찬곤 desk@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경제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