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달 6월이 저문 지도 어느새 달포가 지났다. 그럼에도 4강 신화와 붉은 악마들의 환호와 거스 히딩크의 지도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모든 감동의 순간들 중에서도 한량없이 나를 사로잡은 장면은, 선수 전원과 감독 코치가 하나되어 그라운드에 넙죽 엎드려 온몸으로 인사하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때 참으로 큰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 행복감이 아직도 내 마음에 여운이 되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온 국민이 열두번째 선수가 되어 함께 경기에 혼신의 힘을 불태웠다는 점일 것이다. 생각할수록 자랑스럽고 눈물겹다.
스포츠에서 문화 4강국으로
여기서 나는 월드컵 이후에 대하여 몇 가지 생각나는 점들을 얘기해 보고 싶다.
우선, 월드컵 4강 신화를 지속적으로 이어서 세계 선진국으로, 그리고 경제 4강으로 도약하자는 소리를 듣고 있다. 물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경제 발전이 국가 발전의 긴요한 초석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경제만이 국가 발전의 최대목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결국 선진문화로, 또한 성숙한 민족혼으로 도약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붉은 악마의 일체감은 질서·양보·청결의식에서 더욱 값진 체험과 자신감을 얻었다. '판'이 어우러지면서 역사상 초유의 신명을 누리고 긍지를 확인했다.
우리는 지구촌 전 인류 앞에 보여준 자랑스런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작금의 정치판이 안타깝다 못해 분통터지는 꼴이다.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세계 4위의 신화적 위업을 쌓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5공 청문회'. 한시도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 사상 초유의 비리와 음모 앞에 망연자실했던 아픔을 지을 수 없다. 과연 종합 4위의 후광은 몇 달이나 이어졌던가.
판을 깨지 말고 새판을 열어야
오늘의 정국은 어떤가? 8·8 국회의원 재보선을 앞둔 폭로와 진흙탕 싸움, 대통령의 아들들의 부정과 거대 야당 대권후보의 5대 의혹, 국무총리 인준과 연말 대선을 겨냥한 혼탁한 정치 싸움…‥. 도대체 왜 '판'을 깨고 있는가?
월드컵 이후 'W세대'라고 명명된 우리나라의 희망세대가 이룩한 그 장한 성과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거룩한 월드컵 성공의 위업조차 결코 일회성을 만들 수는 없다.
그동안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기주의와 무기력함, 단세포적 열광과 진지하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한 즉흥성들이 그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었다. 허나 월드컵에서 보여준 모습은 재론의 여지도 없이 믿음직한 우리의 내일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청소년에게 문화·놀이의 건전한 '판'을 만들어 주자. 정치와 매스컴과 사회 구석구석에서 '판'을 깨지 말자. 건전하고 가치있는 판을 만들어 주었을 때, 그들은 다시 멋진 삶의 신명을 선물해 올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창조적 역량을 결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주역}의 64괘는 거의 모두 상대적이다. 길과 흉·화와 복·장점과 단점·성공과 실패들. 월드컵 4강 신화의 '길·복·장·성'의 결과에 지나치게 들뜨지 말고, '흉·화·단·패'를 경계하자. 다만 오직 한 괘 '겸(謙)'만은 그늘이 없다. 정치도 문화도 생활 모든 영역에서 겸손을 배우고 겸허를 나투어야 하리라.
/이용숙(전주교대 총장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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