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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故 송준호선생님 영전에

 

채숙당 송준호 선생님의 영전에 올리나이다.

 

엊그제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선생님이 오늘에 와서는 유명을 달리하여 제가 선생님 앞에 조사를 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인생무상이라 하였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

 

선생님의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게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연구실에서 틀어박혀 집필생활에만 몰두하시던 선생님께서 지난 10월 몸이 편찮으시다고 말씀하실 때 미리 알았어야 했습니다. 선생님께 전화로 안부를 살피면서 크게 나쁜 것은 아니라 하시기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선생님이 엊그제 병원에 입원까지 하셨다기에 바로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말씀을 제대로 못하는 선생님을 뵙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전북대 부속병원 응급실로 옮겼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새벽에 운명하셨으니 이 짧은 시간의 황망함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과 인연이 된지 40년, 그 사이 비록 근무하는 직장은 다르지만 사흘이 멀다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선생님과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면 나눌 이야기가 많지 않았었지요. 그만큼 선생님은 자나깨나 학문으로 시작해 학문으로 삶을 보내셨습니다. 그 학문도 주로 사학에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중년부터 미국 하바드대학의 한국학과 와그너 교수와 조선조의 문과급제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20여년동안이나 몰두하셨습니다. 또 거기에 수반해 조선사회사를 연구하여 저서로 내놓으니 국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서까지 높이 평가를 받았습니다.

 

국내 일부 학계에서는 조선사회사를 조선사회가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는 사회로 보았다며, 역사는 민중이 이끈다는 원칙에 안 맞는 사관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요.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입니다.

 

그렇다고하더라도 이미 선생님의 연구는 우리 사학계에 크나큰 문제를 제기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거성(巨星)이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떠나셨으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어떤 의문이라도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면 해결되었기에 하나도 어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후배를 길러야 한다며 1980년대에 심권 이강오 교수와 전북향토문화연구회를 조직해 이 땅의 젊은이에게 고전을 가르치고 바르게 사는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모두가 후학을 위한 선생님의 배려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가셨습니다.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선생님은 83세의 장수를 누리시면서도 학문적으로 채워지지 못한 열정을 끝내 버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제 편히 가십시오. 슬하의 자녀들도 모두 건전하니 못 잊으실 일 없으시겠지요. 부디 이승의 일들은 모두 떨치고 편안하게 가십시오.

 

아, 슬프고 슬플 뿐입니다.

 

/2003년 11월 14일 양만정 올림(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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