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무화과 잎이 창문을 흔드는 대보름날이었다.
그 많던 식구들은 공중탕으로 간 것일까? 우연히 남게된 어머니와 나. 어머니는 내 머리를 만지기도 하고 손톱을 뒤져보면서 한숨쉬듯 한 마디 하셨다.
"배 아프게 낳은 자식이 여덟인데 하나도 내 성을 갖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다가 가다니......”
그 날 이후 아련한 어머니의 분 냄새와 함께 황이라는 성을 얻었다. 외삼촌이 오시면 '황**야!'하고 식구들 몰래 나를 불렀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자윤이라는 이름도 손수 지어 주셨다. 30년 전 글도 모르는 어머니는 무의식 속에 호주제의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남성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 세력에 서서 변화되지 않고 있다. 여성은 아주 빠르게 새로운 시대로 가고 있지만 헛바퀴를 돌고 있다. 남성과 함께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남성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상담을 하다보면 가해자는 언제나 남성이고 피해자는 어린이와 여성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의 문제도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남성들은 눈치가 없는 것 같다.
많은 토론을 거쳐 여성시대의 정책방향이 바뀌고 있고 복지 시설은 여성주의 시각 안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 천년 내려온 기득권과 가족제도를 바꾸는 일은 여성의 힘만은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여성학자인 필리스 체슬러는 '죽이고 싶은 여자가 되라'는 책에서 '여성을 가르치는 선생은 주로 가부장적인 선생이었으며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다 편견의 선생이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찾고 싶은 새로운 여성은 오래 전에 있었다. 단지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관습과 이성중심이 있었을 뿐이다. 또한 양성 평등도 이미 있었다. 우리나라는 양성평등의 최고 국가이다. 상징적인 태극기에서 건곤(乾坤)의 조화와 공존이 대표적이며 어느 나라에도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단지 편견에 가려져 호주제 폐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성은 죽이고 싶은 편견에서 감정을 살려내 가장 사람답게 실천하는 여자일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익산지역 북부 시장 입구에 들어설 때면 늘 아름다운 풍경을 본다. 아줌마의 때묻은 야채보따리를 성큼 들어주는 것은 말없이 앉아서 졸던 아저씨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로가 없이는 못사는 사이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서로 사랑하라! 누가 말했던가...
/양황 자윤 익산여성의 전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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