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6 09:12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학·출판
일반기사

허영선 시인의 '뿌리의 노래'

 

'얘야 걱정 마라/빛이 사라졌지만 두려운 건 어둠이 아니란다/두려운 건 길 위에서 길을 잃은 희망이란다'('빌레못 동굴의 두 모녀'부분)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2리 터널식 용암동굴에서 45년 만에 발견된 한 몸이 된 모녀의 유골. '꼬옥 껴안았던 형체만이 그림자'로 남아 있는 그곳에서 '빈 젖 있는 대로 쥐어짜던 어미의 파삭한 소리'를 엿들은 한 시인은 어미의 나지막한 음성을 시집에 담았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니고,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해 온 허영선 시인(47)이 20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뿌리의 노래'(당그래 펴냄).

 

서정과 서사를 적절하게 이용해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무명천 할머니'부분) 그 시절 그 때, 역사에 가려졌던 여인들의 여린 넋을 불러낸 '뿌리의 노래'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진혼(鎭魂)이다. '견딤'을 통해 삶을 이어온 제주 사람들의 끈질김과 낙관적 정서를 노래한 64편의 시는 역사와의 경계를 허문다.

 

시집의 첫 테마인 '여인열전'의 시 17편은 4·3사건을 직접 체험한 할머니들의 피맺힌 육성이 성난 파도처럼 다가온다. '토벌대의 총에 턱을 잃고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채 평생을 홀로 살아온 월령리 진아영', '뱃속 아기 일곱 달/매 맞는 에미 품에서 꽁꽁 숨죽인 채/질기게 살았던 사내 아이 하나 남기고 모든 가족이 몰살당한 삼천리 강도화 할머니', '광기 어린 쇠좆매 후려쳐도 거꾸로 매달려 물벼락에 육신 젖어도 이웃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는 고내리 홍보살님'의 증언은 통한이 가득하다.

 

"과거의 바다를 헤치고 나온 4·3 광풍 속에 살아남은 여인들의 몸의 소리를 온 몸으로 듣고 싶었다”는 시인은 "뒤틀리는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흙이 뿌리를 움켜쥐듯 오래도록 절였던 고통을 껴안고 나온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제주일보·제민일보에서 23년 동안 기자생활을 해 온 시인은 1980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1983년 첫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청하 펴냄)을 냈다. 지난해 신문에 연재하던 글을 추려 꿰맨 산문집 '섬, 기억의 바람'(책만드는공장 펴냄)에도 온몸으로 부딪힌 제주의 숨결이 생동감 있게 녹아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기우 desk@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