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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상]검지손가락

 

검지손가락

 

어렸을 적부터 아빠는 34살에 얻은 막내딸인 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었는데 뭘 그리도 데리고 다니셨는지...

 

아빠는 항상 나에게 검지손가락을 펴주셨고 그럼 나는 뭉툭하고 거친 아빠의 검지손가락을 팍 움켜쥐고는 강아지 마냥 쫄래쫄래 따라 다녔다.

 

몇 년 전이었을까, 초등학교6학년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오래되지 않은 기억 같은데. 햇수로 따지면 벌써 4년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4년 전, 아직 겨울의 추위가 가시지 않아 치마 속을 바람이 간질일 무렵, 원래 살고 있던 부안군 변산 에서 전주로 진학하는 오빠를 따라서 전주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난 처음으로 가는 이사에 아무것도 모른체 그저 신이나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엄마의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도 아닌, 그렇다고 우울한 표정도 아님 겉잡을수 없는 표정이 머물고 있었다. 전주로 이사 가는 것은 엄마, 오빠 그리고 나까지 세 명뿐이었다.

 

아빠의 직업은 중학교 교사, 교사로 일하고 계시는 학교는 집 근처의 중학교이다.

 

그 중학교에서 20년을 넘게 아이들을 가르쳐 오셨다.

 

아빠는 끝까지 자신은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전주로 이사를 가게 되면 학교 일을 이제껏해 온 만큼 할 수 없고, 자칫 잘못하면 학교 일에 소홀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아빠는 그곳에 머물러 계신다고 하셨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빠는 변산에 남게 되고 나머지는 전주로 오게되었다. 자연스레 아빠와는 멀어지게 되었고 일주일에 한번, 많으면 세 번 만나는 게 다였다. 그것도 밤에 오실 때가 많기 때문에 나는 못 볼 때가 많았다. 아빠와 얼굴을 오래 볼 수 있는 시간은 방학이었다. 허나 그 방학마저 아빠는 학교보충수업에 나는 학원에,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13년 동안 얼굴을 보고 살다가 갑작스레 볼수 없게 되니... 그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이사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지나고 아빠가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그 대신 엄마가 변산에 내려갔다 오는 식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아빠 몸이 좋지 않아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뇨병이라는 병을 10년 이상 가지고 계신 아빠에겐 힘든 것이었을 텐데 그때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리 아빠를 원망하고 서운해했는지... 여름방학이 지난 후 아빠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서 혈당수치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엄마가 옆에서 밥을 챙겨 드릴수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설탕과 미원이 많이 들어간 식당음식을 먹게 되고 건강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엄마는 전주에서 오빠와 내 곁에 있기는 했지만 항상 마음은 아빠 곁에 계셨다. 엄마도 아빠걱정으로 건강이 덩달아 나빠지셨고 그로 인해 우리 집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였다. 입학하고 얼마 있지 않은 3월말에

 

어느 날 오빠는 엄마에게 기숙사레 들어가겠다며 엄마를 설득했고, 하룻밤을 꼬박 고민한 끝에 오빠는 기숙사로 나와 엄마는 원래 살았던 고향, 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 난 변산 에서 중학교 3년을 다니고 오빠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전주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오빠와는 달리 난 지금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 나와 비슷하게 타 지역에서 올라온 아이들은 주말에 대부분 집에 내려가지만, 버스 오래 타는 것을 죽는 것 보다 싫어하는 나는 집에 자주 내려가지 못한다.

 

가족과 자주 만날 수 없어 오늘 같은날에 더욱더 가족이 그리워진다.

 

이번주엔 변산집 에 내려가서 아빠의 검지손가락을 잡고 어릴적 그 모습으로 돌아가 동네 한바퀴를 산책 해야겠다

/고은해(전주여고 1학년)

 

<글을 읽고>

 

<검지손가락> 은 오늘의 이야기이면서도 오래된 이야기이고 또 끝없을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이고, 부모와 자식의 문제이고, 자식의 꿈을 위한 부모의 희생은 끝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희생은 이 글에서처럼 자신의 병마를 감춘 것이기도 하고, 새로운 발병을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아픈 사실이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은 가족을 서로 연결시켜 주던 '검지손가락'을 오래 잊고 산다는 사실에 있다. 은해가 버스를 오래 타는 고역을 무릅쓰고 고향에 내려가려 마음을 먹는 것은 그래서 작지만 아름다운 혁명이다.

 

/오창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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