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뉴스에선 내일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것을 예보하고 있다. 태풍 라마순을 피하려다 장마를 만나는 건 아닌가. 태풍을 핑계대고 게으름 피운 게 이토록 후회가 될 줄이야. 기말고사 채점하느라 정신없는 나를 본체만체 내일 소풍간다는 소리에 아이는 좋아라 외치며 할머니 손을 잡고 장보러 간다. 이번 문학기행에 나는 아이와 친정어머니와 동행 할 계획이다.
'우리 엄마는 매일 주말마다 쿨쿨 잠만 잔다'는 아이의 푸념을 잠재우기 위해서, 게다가 딸네 집 살림해주느라 멀쩡한 집과 서방을 놔두고 비좁은 아파트 창살 없는 감옥살이에 지쳐가는 엄마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라도,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나는 내일 남원에 간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일어나자마자 베란다에 나가 창문부터 열어본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고 등허리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만 같다. "아! 결국은 장대비를 맞아야 하는 구나!” 내 심난한 기분과는 무관하게 아이와 엄마는 마냥 즐거운가보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고 과일을 깎는다. 도시락을 싸고 남은 김밥 꽁다리로 아침 해결. 드디어 모녀 3대, 집을 나선다.
남원 가는 길, 막 전주를 벗어나 관촌에 들어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수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비가 그친다. 다행이다. '입이 서울'이라고 물어물어 '혼불 문학관'이 자리한 노봉마을 도착.
마을 뒤를 병풍처럼 두른 노적봉은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혼불 문학관을 에워싸고 있다. '혼불 지킴이' 황영순 선생께서 마중을 나와 계신다. 마을 입구에는 '꽃심을 지닌 땅', '아소님하'를 새긴 한 쌍의 장승이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긴다. 남원시의 지원을 받아 올 가을 개관 예정인 문학관은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백제문화연구회' 회원으로 계시는 사장님께서 '혼불'에 대한 애정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고 지었다는 문학관은 전시실과 학습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실에는 작가의 유품을 전시하고 작가의 생전 집필실을 그대로 재현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혼불의 주요 사건을 디오라마(diorama)로 재현해 전시하게 된다. 문학관 오른 편에는 학습실이 있다. 학습실은 방문객들에게 작가 최명희와 '혼불'에 대해 교육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불과 관련된 세미나를 열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될 것이라고 한다.
학습실 아래 고풍스런 정자에 올라보니 팔공산과 성수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맑은 날은 만향산의 주봉 천왕봉까지 보인다는데 날이 흐려 천왕봉을 볼 수가 없다. 정자에 서 굽어보니 청호가 바라다 보인다. 완공 당시 둘레가 사방 오 리가 넘었다던 청호. 첫날 밤 소박맞은 인월댁이 각시 복숭아 진분홍 꽃잎이 숨막히게 지고 지던 밤 몸을 던진 청호. 그 청호는 저수지를 만든 청암부인을 존경하는 뜻에서 사람들이 호수 호(湖)자에 청암부인의 택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문학관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거멍굴과 고리배미가 있다. 거멍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지난 해 장마에 유실된 돌다리를 대신해 튼튼한 철제다리가 서 있다. 찻길은 다리에서 끊어지고, 우리는 걸어서 거멍굴(黑谷) 근심바위 앞까지 갔다. 천민 춘복과 옹구네, 공배네, 평순네, 무당 백단이, 무부 홍술이, 백정 택주네들이 모여 남루한 일상을 이어가던 거멍굴, 그 한 복판에 검은 덩치로 커다랗게 우그리고 앉은 '근심바우' 아래에서 한 아낙이 밭을 매고 있다. 그네는 '변동천하'를 꿈꾸던 춘복과 '투장'을 통해서라도 시아버지의 뼛속 깊이 새긴 한을 풀어주려던 무당 백단이와 무부 만동이의 피맺힌 절규를 알고 있을까.
거멍굴을 나와 고리배미리로 향한다. 공명첩을 사가지고 의관(議官) 자리를 얻어 양반행세를 하다 매안 이씨 양반들에게 끌려가 멍석말이를 당하고 초죽음이 된 엄장업. 그가 장독 오른 다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들 병곤에게 이르던 말이 떠오른다. "내 생전에 못 산 세상, 너는 살어 볼 수 있을랑가. 신분을 설워 말고 그저 죽으나 사나 돈. 돈을 모아얀다. 우리 같은 인생은 돈이 양반이여. 그것조차 없으먼 개뻭다구만도 못헌 거이 우리 신세다. 너는 인자 나중에 꼭 의관보담은 좀더 높은 놈으로 베실을 사서 정자관을 보란디끼 써 바라. 망할 놈의 정자관.” 엄장업의 설움 받친 절규 때문인가. 예나 지금이나 민촌 고리배미에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고리배미를 뒤로 하고 노봉마을과 더불어 '혼불'의 무대가 된 사매면 대신리 상신마을을 찾았다. 이씨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마을 입구에는 '매화낙지(梅花落地)' 명당이 있다. 마을 뒤 '계룡산에서 핀 매화가 떨어진 곳' 매화낙지에 서니 "명당, 명당 해도 선조의 정신을 모으는 후손의 마음자리가 제일 큰 명당이지. 그 마음자리가 썩어 있으면 이백 년 송 관목이 다 무엇이고, 좌청룡·우백호가 다 무엇이야, 무단한 공염불일 뿐.”이라던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명당자리 구경을 마치고 서도역(書道驛)에 들렀다. 서도(書道)라는 명칭은 근처에 서원이 많았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역 맞은 편에는 일제 시대에 세워진 듯한 목조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구멍가게가 된 그 2층 목조건물 벽에는 '서도역 운송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역 양 옆으로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고, 좀더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벚나무 아래 다람쥐가 뛰놀고 있다. 소설 속의 서도역은 번화한 곳이다. 오고가는 사람들로 번잡하던 그곳이 지금은 다람쥐 놀이터가 되어 있다. 강모와 효원 그리고 청암이 내딛었을 역사에는 이름 없는 꽃들이 만개해 있다.
사리반댁을 비롯한 매안 이씨 며느리들이 화전놀이를 하던 삼계석문을 지나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에 있는 이웅재 고가를 찾아 간다. 매안 이씨 종가의 서슬퍼런 위상을 상징하듯 높이 솟은 솟을대문 양 옆에는 하마석(下馬石)이 놓여 있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편으로 마굿간이 보인다. 안에 놓인 다섯 칸짜리 말구유가 그 옛날 종가의 번영을 말해준다. 지금은 말을 대신해 누런 황소가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토방을 딛고 사랑채가 서있다. 사랑채 뒤편 처마가 지난 해 장마로 인해 위태롭게 내려앉고 있다. 사랑채 위로는 사당이, 오른 편으로 안채가 놓여 있다. 사당 한켠 텃밭 가에는 매실이 농익어 바닥에 쏟아져 있다. 열매를 거둬들일 일손이 부족한 탓일까. 사당에 쌓인 먼지처럼 초여름 종가의 뒤안은 쓸쓸하고 고즈넉하다. 종가 가장 깊숙한 곳에 'ㄷ'자형 안채가 있다. 안채를 지키는 연로한 종부께 혼자서 큰 집을 지키기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집이 누추해 손님들이 오면 죄송스럽다며 수줍어하신다.
늙은 종부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혼불 문학관으로 향한다. 한나절이 넘도록 친절하게 안내를 맡아주신 황 선생님과 함께 문학관 정자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준비한 도시락으로 고마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송스러울 뿐이다. 왜 그토록 '혼불'을 사랑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혼불 속에 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 지금까지 '혼불'을 다섯 번 읽었고 앞으로 다섯 번을 더 읽겠다는 그분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 왜일까.
/고은미(전주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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