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란 전주시정발전연구원 연구원
낯선 도시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 곳을 회상할 때 처음 떠올리게 되는 영상은 역을 빠져나와 눈앞에 펼쳐졌던 거리의 풍경이나 번화한 상점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들은 오랫동안 그 도시의 이미지로 남겨진다.
이것은 외지인들이 전주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주역에 내려 처음 접하게 되는 영상은 곧게 뻗은 백제로와 그 주변에 늘어선 건물들, 그리고 빼곡하게 들어찬 간판일 것이다. 만일 방문시간이 밤이라면 현란한 네온으로 번쩍거리고 있는 간판은 그 어느 것보다 먼저 시야로 들어오는 것이며 이것은 전주의 첫 번째 영상이 될 것이다.
기차역을 이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면서 울긋불긋한 간판들이 빼곡한 거리의 모습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것은 전주를 아름답지 못한 도시라고 낙인찍는데 빌미로 제공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도시하면 유럽의 도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왜 아름다운지에 대해 건물의 형태나 거리의 전경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속에는 간판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상점가에는 크지도 않고, 튀지도 않는 마치 처음부터 건물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간판들이 있다. 그 덕분인지 거리를 걸을 때 간판보다는 거리의 전경이 먼저 시야로 들어오고, 건축물의 형태도 한눈에 알아 볼 수가 있다. 어떤 간판들은 그 자체가 예술작품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다고 이들의 간판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치밀한 상술에 의해 간판이 설치된다. 일례로, 외국의 한 도시에서는 간판정비에 앞서 이용자의 시각에서 간판이 가장 잘 인지되는 위치와 크기를 먼저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저층부에 조그맣고 아름다운 간판들을 부착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간판 포렴(布簾)은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물건을 조금 사는 사람도 부끄럽지 않게 얼굴을 가려주는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포렴은 간판이라기보다는 손님에 대한 주인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건물주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간판을 달거나 떼지도 않는다고 한다. 간판이 가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거리, 나아가 도시 전체의 이미지와 관계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의 간판 속에서는 손님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거리의 이미지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왜 우리의 거리에서는 간판들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이는 간판에 대한 오해 탓이 아닌가 싶다.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간판을 마치 부적처럼 여긴다. 간판이 좋아야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업종이 뭐든 간에 주인들이 선호하는 간판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게 문제다. 어디에서 보더라도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크기와 색깔, 선정적인 상호, 여기에 화려한 네온까지 덧붙여진 간판이 상가의 전면을 다 채워져야 만이 주인은 안심을 한다. 이렇다 보니 벽, 창문 할 것 없이 가능한 자리에는 모두 간판이 부착되어 건물의 형태나 재질은 알아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간판의 반 이상은 원색이다 보니 주택가의 거리마저 유흥가를 방불케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법에서 간판의 설치를 제한하고 있고, 지자체마다 불법 간판들에 대한 철거전쟁을 선포하기도 하고 대대적인 간판정비사업을 추진해오고도 있다. 하지만 그 성과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이는 간판정비가 광고주의 자율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머지않아 전주한옥마을의 간판들이 정비된다고 한다. 단아한 한옥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간판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었는데 새롭게 단장된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저 깔끔하기만 간판이 일률적으로 매달리는 건 아닌지 혹여 아름답다고 외국의 간판들이 그대로 모방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앞선다. 똑같은 간판은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매력 없을 게 분명하고, 예쁘다고 남의 얼굴을 가져와 우리 얼굴로 삼을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판정비에 앞서 외국의 간판 속에 숨겨진 배려의 마음과 합리적인 상술만은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우리에게도 우리 도시의 얼굴이 될 간판들이 생겨나길 바란다.
/윤정란(전주시정발전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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