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춘택(전 전주 기린중교사)
4·9혁명은 우리 근대사에서 국민의 참된 용기와 개발도상국에서 민주 국민의 자질을 여실히 보여주며 역사적 물줄기를 바꾼 획기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8·15광복 후 민주주의 국가로 정부를 수립하고 그 체제를 갖출 무렵 6·25사변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림 속에 전쟁의 고통을 참아내며 뒷수습에 신경쓰느라 미처 민주의식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때 장기집권에 혈안이 된 자유당 정권은 3?5부정선거를 저지르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심을 짓밟았다. 투표장에 여야 참관인이 고루 있어야 하는데 여당만이 차지한 곳이 있었고 대리투표가 이뤄졌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3인조를 편성하여 공개 투표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에 국민들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 이무렵 학생들은 4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대학가는 3·5부정 선거로 연일 시끄러웠고 관권이 개입된 투표절차에 대한 학생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 예로 전북대학교 교정에서 1960년 4월 4일 정치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장기 집권을 노린 이승만의 1인 독재와 3·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대가 있었다.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나오려할 때 이를 눈치챈 사복 경찰관들의 제지로 데모대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교내에서만 규탄데모가 이뤄졌으나 그것이 바로 4·9혁명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언론에서 크게 보도 되지는 못했으나 전북일보(1960년 4월 5일)와 전북대 신문 (4월 13일) 기사내용에서 그 당시 상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후 4월 11일 남원출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을 도화선으로 4·9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다음 날부터 각지에서 국민들이 구름처럼 들고 일어나 이승만대통령의 1인 독재와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 데모대열에 합류, 국민들의 힘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면서 민주화 실현의 꿈이 이뤄졌다.
당시 서울 한성여중 2학년에 다니던 진영숙양이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죽기 전 어머니에게 쓴 애절한 유서 내용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십시오.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읽고 또 읽어봐도 어린 소녀의 애국어린 감정이 가슴에 와 닿았다.
4·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 탈취를 위한 목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로운 집단행동으로 사태가 발전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그런 점에서한때 4·9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의거라고 불려 졌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임시과도기를 거쳐 제 2공화국이 탄생되었기 때문에 다시 혁명이란 단어로 바뀌어 진 것이다.
올해로 4·9 혁명 46주년을 맞이하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한 분들의 정신을 높이 기리며,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희생된 학생들에게 깊은애도의 뜻을 표한다.
4·9혁명의 의의를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세상을 바로 볼 줄 알고 나라를 사랑하며 올바르게 성장 할 수 있도록 서로 협동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4·9혁명을 통해서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황춘택(전 전주 기린중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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