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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전주안디옥교회 원로목사 이동휘 - 하나님의 선물

자식의 덕 옹골지게

중매 건이 터졌다. 이제야 결혼이 성사되는가 하여 늙은 총각의 초초함이 계속되는 가운데 처녀 집에서는 큰 토론이 벌어졌다고 나중에 들었다. 당시 나는 시골교회 전도사였다. 전기도 전화도 없고, 교통이 불편한 시골에서 살았다. 그러나 규수는 전주에서 살았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도시 생활 속에서 신식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은 목사의 위치가 처녀들의 구미를 당길 정도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목사는 여대생들이 선호하는 대상으로는 만년 하위였다. 그러니 규수가 중매에 응할리가 없었고, 왜 목사에게 시집보내려 하느냐며 아버지에게 자꾸 따졌다고 한다. 따지고보면 목사는 중인데 내가 시집가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도사 총각을 좋게 본 처녀 아버지는 “중이지만 신식 중이다”하며 설득했다고 한다. 시골목회를 19년이나 한 관계로 시달림도, 어려움도 있었겠으나 하나님의 선물로 오늘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네 자녀를 양육하고 내조해 준 아내의 노고에 감사하며 이런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또 감사드린다.

 

나는 자녀를 자유롭게 키웠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관계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음악을 많이 듣도록 했다. 기독교 가정은 원래 찬송가를 많이 부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자녀 덕을 많이 본 사람이다. 아내의 말을 빌리면, 나같이 자식 덕을 옹골지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주 안디옥교회 개척을 늦은 49살에 했다. 대학생이 셋이어서 주일학교, 찬양대 등 교회 모든 부서의 봉사를 우리 자녀들이 맡아 했고, 처음부터 인물난을 느끼지 못했다. 무보수 일꾼들이 든든하게 받쳐주니 처음 기초를 놓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목회철학대로 진행할 수가 있었다. 자녀들 때문에 어려운 문제를 겪지도 않았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친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이들을 모두 선교사로 불러주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큰딸은 피아노를 전공하고 정읍중학교 교사로, KBS전주방송국 합창단 반주자로, 전주시립합창단 반주자로 장기간 봉사하다가 결혼하여 9년 전에 아프카니스탄 선교사로 가서 일하고 있다. 큰 사위는 의사로서 병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둘째딸은 결혼하여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부름받아 16년째 음악선교사로 있고, 사위는 교수로 사역하다가 지금은 바울선교회 미주개발원 선교동원 사역으로 미주에 살고 있다. 셋째아들은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뒤 키프러스 선교사로 4년째 방송사역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은 사도바울이 처음으로 전도하러 간 지중해의 구브로 섬이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다. 넷째아들도 영국에서 공부하고 바울선교회 27기 선교사 후보생으로 국내 훈련을 마쳤다. 필리핀에서 8개월 훈련받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훈련받은 후 선교지로 떠날 예정이다. 특별나게 훌륭한 자녀들도 아닌데, 존귀한 일에 가담하게 하시어 사용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우리 어머니 기도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 같은 사람도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성직자가 되었다. 또 그 신앙의 유산이 손자들에게까지 미치었음을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신 8명의 손자 손녀들도 모두 선교사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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