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옛날이나 지금이나 농촌의 경제적 낙후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46년 전 신학교 나올 때 역시 80% 농민이 가장 큰 설움 속에 살았던 것을 나는 농민출신으로서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농촌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농어촌을 살리는 길이 무엇일까. 나는 농촌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다.
계몽적인 일을 구상, 몇 가지 일도 추진하면서 어언 19년간 농촌 목회를 감당했다. 전주로 교회를 옮기면서 그 부담은 여전히 남아 농어촌 지역을 위해 도시교회가 할 일을 찾았다. 23년 전 안디옥교회를 개척하는 해에 12명의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과 더불어 농어촌교회 성장연구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농촌지역의 구심점이 되어 한국농촌을 살리는데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토론을 했고, 본격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했다. 2개월마다 세미나를 열어 이들을 회집시켰는데, 농민운동에 앞장선 전국의 강사들을 초빙하여 주옥같은 강의를 들었다.
그때 깨달은 점은 한국의 의인은 모두 농촌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버스가 하루에 한두 차례 드나드는 시골에서 생명농업을 하는 목사님 이야기를 비롯하여 유기농업, 부채탕감운동, 농촌계몽운동, 소득증대를 위한 부업장려, 우리 땅 살리기 등 많은 사례가 가슴을 확 트이게 했다.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가 중심이 되어 폐쇄적인 사상과 싸우면서 기어코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든 목회자들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전국의 농촌운동가는 거의 안디옥교회를 다녀갔다. 이들의 값진 노고를 정부가 보상해주지 못하고 피폐해져가는 농촌으로 방치해놓는 것을 볼 때 슬픈 마음이 든다. 농촌을 죽이고 부강해지려는 정치철학이 크게 잘못된 것 같다. 이 모임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3년간이라는 회원제도로 수백 명이 이 ‘농촌성장연구회’를 거쳐 갔는데 그 분들이 어느 정도의 자립의지를 가지고 농촌교회를 섬기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 사업의 뒷받침으로 농촌직판장을 설치했다. 이것은 처음에 이들에게 도서비라도 드려서 위로와 격려가 되고자 한 후원체제였다. 농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생산비 이하로 너무 저렴하게 팔려서 농산물 직거래라도 하리라는 생각에서 농촌직판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농촌에 힘을 주었다. 생필품을 사먹고 생활하는 도시인들이 이왕이면 이 직판장에서 사다먹게 될 때 저공해 농산물을 먹을 수 있어 건강에 좋고 농민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믿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교인수가 늘다보니 그 영향력도 대단해서 여기서 나오는 자금으로 매년 농어촌 교회를 설립할 수 있는 결실이 맺어진다.
우리교회에 선교회가 모두 219개가 있다. 각 선교회의 농촌선교부는 1년에 한 번씩 우리와 협력 관계에 있는 농어촌 교회를 방문해야 한다. 선물과 위로의 방문을 통하여 농촌교회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풍요로운 도시인들의 나태함을 깨우쳐주는 교훈을 받고 오기도 한다. 시골학교가 날로 폐쇄되고 농토가 버려진 땅으로 무가치해지고 농민이 천대받는 서글픈 농촌풍경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정부도 생산성 없는 농촌으로 취급하여 눈앞의 경제성만 따지는 근시안적 판단에서 벗어나야 하리라고 본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