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부교수로서 새출발…교과서 저술
내가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인 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일합작투자와 일본기업의 직접투자 그리고 대일청구권자금에 의한 공공투자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몇몇 기업체로부터 같이 사업을 하든가 자문에 응해달라는 부탁이 많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한 처지라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터였다. 지도교수님이 일본의 대학을 몇 군데 추천까지 해주셨지만 귀국하여 국방대학원의 조교수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대통령 발령인 조교수였지만 유신정권의 말기적인 상황과 그것도 말 그대로 국방대학원이라 학문보다는 교육이 중심이었고 국가정책이 우선인 특수대학원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학생들이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현역 대령과 정부의 국장급 고급공무원이라 강의부담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강의가 있건 없건 매일 9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해야 하는 생활이었다. 내가 생각한 자유스럽게 연구하는 대학교수 생활의 모습과는 달라 스스로 그만두고 나오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선배교수들의 도움으로 정들었던 중앙대학교 부교수로 오게 되어, 모두에게 감사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다시 새출발을 하였다
우선은 책임시간만 강의하고 한국경제론이라는 책을 쓰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론서적으로서의 한국경제론이란 책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학위논문을 정리하여 교과서로 만드는데 노력하였다.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의 탄생은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 사회적 평등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로서, 이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의 선진국에서 산업혁명에 의해 이룩되었다.
서양의 경우 농업내부에서 아래로부터 생산방식이 바뀌어 공업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를 나는 원형의 근대국가라고 이름붙였다. 그리고 일본은 100년 후에 명치유신이라는 위로부터 법률과 제도로 근대국가의 모양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변형의 근대국가라고 구별하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국가가 권력으로 위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영국과 같이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본과 같이 한말의 정부가 제도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며,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정책으로 옆으로부터 만들어냈기 때문에 특수형이라고 구분하였다. 이같은 특수형인 한국경제의 형성과정과 변화 및 발전과정을 총정리한 책이 바로 법문사(法文社)에서 출판한 ‘한국경제론’이었다.
이 책으로 강의도 하고 그 일부를 서울대신문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도 발표하여 경제학계에 새로운 바람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학생들 교육에 철저한 자세로 임하기로 마음먹고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교수가 아니고 스승이 되고자 하니, 여러분은 나에게 학생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인격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자들의 스승으로서 사표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진정한 학자이자 스승이고자 거듭 다짐했다.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우리나라에는 나보다도 훌륭한 교수가 많지만 그분들이 여러분의 스승은 아니다. 나 역시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는 여러분보다 훌륭한 학생들이 많지만 나의 제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나와 여러분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것을 첫 시간에 선언한 것이다. 모든 면에서 제자들의 스승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끈끈한 사제지간의 정을 만들어 대학생활의 보람을 느끼면서 정년을 맞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의 첫 회에서 특별하지도 못한 보통사람이라고 강조한 바 있지만, 나는 보통사람 중에서도 항상 늦게 출발하고 뒤떨어진 지각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대학의 강사도 늦게 시작했으며, 외국유학도 30세가 훨씬 넘어서 떠났다. 따라서 박사학위도 다른 사람에 비해 뒤늦게 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 결과로 교수도 40세가 넘어서 늦게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결혼 역시 남보다 늦어 아들딸을 늦게 둔 것은 물론이고, 생활기반 역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항상 인생의 지각생이라고 생각하며 이왕 늦었으니까 오히려 서둘지 않고 차분히 여유있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다른 교수들에 비하여 연구활동도 부족하였고 사회활동은 더욱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학기간은 군사독재시기였으며, 귀국 후의 80년대에도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대학사회는 온통 민주화투쟁과 이를 탄압하는 최루탄 정국으로 얼룩져 상아탑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기였다.
나 역시 동경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빌미로 유형무형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당시의 이러한 사회적인 여건을 감안하고 학생지도는 물론이고 연구와 저술활동만으로 지각생의 부족함을 보충하는데 노력하였다. 때마침 경제성장에 따라 대외무역이 활발해지고 외자유치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일본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한국경제는 오늘날과는 달리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고 유럽과의 대외무역도 미미하였으며, 동남아시아와도 경제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점차 확대되어가는 추세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기업에서의 일본경제에 관한 강연 요청이 많아져서 생각하지도 않게 바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일본에서 6년간 공부하면서도 일본경제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경제를 체계적으로 강연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다시 일본에 다니면서 일본경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이를 토대로 일본경제의 형성과 변질(제국주의화) 그리고 성장과 발전을 총정리한 500쪽에 달하는 ‘일본경제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책(法文社)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판하여 경제계와 학계가 일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지각생이 된 나로서는 다른 사람을 뒤쫓아 열심히 살다보니 인생의 마감도 지각생이 되어 오래오래 살 것이라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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