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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의 건축이야기] 조선시대 건축법

'집에 대한 욕심'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어느 시대나 그 시대정신이 퇴색하게 되면 우선 의식주가 화려해지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도 세종이 즉위하여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사대부들의 살림집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고 화려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세종은 1431년 가사(家舍)를 규제하도록 집현전에 어명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당시사회는 지금처럼 사회구성원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지도 않았고 건축물도 비교적 단순명쾌하였으므로, 건축규제 자체도 훨씬 간결하고 상당히 구체적이었다고 한다.

 

기둥 4개가 모여서 이루어진 공간을 한옥에서는 보통 한 칸(間)이라고 하는데,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등 대군이 사는 집은 60칸이 넘지 못하도록 하였고, 왕자와 공주가 사는 집도 50칸 이내로 제한하였다. 이밖에도 2품 이상의 신하들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그리고 평민들은 10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종의 건폐율에 제한을 두어 건축물의 규모를 규제였던 셈이다.

 

물론 집의 규모뿐만 아니라 주춧돌의 형태와 처마 밑에 접시모양으로 달려 있는 공포(?包)에도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또 공포와 함께 오행(五行) 색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던 당시의 단청(丹靑)도 임금님이 거처하는 궁궐이나 불상이 안치된 사찰이 아니면 일체 사용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한 칸의 실제적인 길이와 기둥높이에 대한 규정이 미흡했던 탓에 여전히 큰 규모의 살림집이 지어지게 되자, 세종은 다시 척도(尺度)를 제한하여 건축물의 규모를 강하게 규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성종과 문종시대에 와서는 당시 사회 분위기 탓이었던지 규정이 다소 느슨해지게 되었고, 중종과 선조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일부권력계층의 집에서 심심치 않게 단청까지 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쫓고 쫓기는 단속과 위반이 반복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요모조모 짚어보다 보면 예나지금이나 ‘집에 대한 욕심’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지금도 건축법과 그 건축에 대한 규제는 날이 갈수록 계속 강화되고 있으나, 남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한 경쟁은 이제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형태를 통하여 더한층 심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숨바꼭질은 언제 그칠지 이제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연일 매스컴에서 난도질당하고 있는 아파트문제만 봐도 그렇다.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외침도 그렇고, 금리를 올리거나 용적률을 상향조정해서라도 집값을 잡겠다는 발상자체도 그렇다. 이제 이건 건축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정신이 퇴락하면서 삐져나오는 우리사회의 완연한 병색이라고 봐야 한다. 건축이란 창으로 들여다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삼호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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