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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청백리 명재상 황희선생을 본받자 - 김기곤

김기곤(전북문화유산해설자)

청백리 명재상 방촌(蔯村) 황 희(黃喜) 선생은 1363년(공민왕 12년)에 장수에서 탄생했다. 선생은 8세에 목은이색, 야은 길재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22세에 진사에 참방하고 1389년 27세에 성균관 학관의 보직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몰락으로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선비들과 교유하게 됐다. 무신들로 집권한 이성계는 구세제민의 선정을 베풀 수 없자 두문동에 치국동량을 하산시킬 것을 설유하게 되었는데 이 때 두문동 72현들의 협의로 지목된 대상이 바로 31세의 황희 선생이었다. 두문동의 수절신들을 대표하여 하산한 황 희 선생은 중용의 도를 이도(吏道)에 접목함으로써 정변의 풍파에서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라의 화평을 도모했다.

 

그는 1413년(태종 13년) 양영대군의 폐 세자 논의의 반대하여 적장세계를 직간함으로써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장수군 임현내면으로 유배당했다. 이 때 그는 이미 귀양 온 고려 말 명재상 정신재 백장 선생을 만나 교유하면서 그 분의 탁월한 경륜을 익히며 우국충정을 논하기도 했다.

 

그는 1422년(세종 4년) 태종의 유언을 받은 세종의 윤허로 유배에서 풀려나 우의정에 기용됐고 이어 1428년(세종 10년)에는 영의정 되기보다 어렵다는 청백리록에 선록되는 최고의 영광을 얻었으며 1431년(세종 13년)에 영의정에 올라 그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게 됐다. 그리고 종신토록 국정에 참여하다 1452년(문종 2년)에 90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 했다.

 

선생은 60여 년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 행정 교육 문화 국방 세제 역사 등 국가 전반에 걸쳐 제도를 쇄신하여 국기를 다져 세종조에 태평성대를 이루어 놓았다.

 

불의에 추상같은 기상으로 중용의 도를 과감히 실천한 황 희 선생!

 

법통을 쇄신하여 국통을 다진 명재상으로서, 극기복례의 도를 몸소 실천한 검소하고 결백한 청백리로서, 오늘의 탐관오리들에게는 이도의 사표가 되고, 속세의 졸부들에게는 더 없는 각성제가 되어 오늘 우리 앞에 다가 선다.

 

/김기곤(전북문화유산해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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