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두(연세대 법대 교수·변호사)
잠시 미국의 로스쿨에 체류할 때의 일이다. 방학 때면 텅 비어야 할 학교가 학기 중 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지역 변호사협회의 연수회가 방학 중에 학교시설을 연수장소로 활용했던 것이다. 땅 덩어리가 좁지도 않은 나라인데 변호사협회 건물이나 연수원이 없어서 대학의 강의실을 빌려 쓰는가 싶어 이상하였다.
우리의 경우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하면 맨 처음 공간부터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연수회를 한다면 연수원건물부터 생각하는 것은 그 이치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연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수할 내용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공연을 활성화한다고 하면 거대한 공연장부터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습관이다. 그러나 이제 서울 외에도 어지간한 지방자치단체는 천 석이 넘는 규모의 대형 공연장을 갖춘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하드웨어를 채울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갖춰져 있느냐에 있다. 안에 채울 내용물이 충분하지 않은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전라북도는 다르다. 사람의 오감을 울리는 여러 가지 문화가 풍부하다 못해 넘치는 우리 고장이 다른 지역과 같이 강당을 짓는데 경쟁하는 것 보다는 이 안에 넣을 사람과 문화를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투자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서너 해 전, 국립극장 야외무대에서 자정이 넘도록 안숙선 명창의 수궁가 완창을 감상한 적이 있다. 안 명창은 세 시간이 넘도록 2백여 명 관객들의 배꼽을 빼놓더니 출출하면 뒷마당에 준비해 놓은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요기하라는 친절까지 베풀면서 대공연을 완성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조수미 공연과 중국 장예모 감독의 투란도트 공연이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다. 하늘극장의 공연과 상암구장의 행사를 단순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운이다. 공연장인지 경기장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운집한 사람들밖에 기억나지 않는 행사와 달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함께 어깨춤을 추고 어우러진 그 밤 공연은 문화의 품격에 있어서 차원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영국 여왕이 찾았다는 안동의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 2백여 평 남짓한 마당에 겨우 두 세 계단 정도 되는 관객석을 갖추고 연중 상시공연하는 하회탈춤극은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일부러 찾고 싶은 곳이자 공연이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소리의 전당”을 생각할 때 문화의 중심인 전라북도에 이런 공연장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장중한 “소리의 전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리꾼이다. 어떤 가수의 노랫말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니까.
/남형두(연세대 법대 교수·변호사)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