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
한 장의 신문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7일 부안군 위도 주민들이 체육행사를 열어 방폐장 유치 갈등 극복을 위한 주민들끼리의 화합의 장을 마련』했다는 것.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방폐장 유치를 놓고 그렇게 까지 싸웠어야 했을까? 모두 고장을 위해서 한 일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부안은, 나아가 전북은 게도 구럭도 다 잃은 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만 속앓이 하고 있지, 다른 사람들에겐 이미 잊혀진 사건이기도 하다.
전북 정무부지사로 있을 때 김종규 당시 부안군수가 방폐장 유치를 선언했다. 양성자가속기와 함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그리고 3천억원이 부록으로 달려 있었다. 서울에서 만난 청와대 모 수석은 『전북은 이제까지 손가락 하나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이제는 앞으로 달릴 일만 남았다. 누워만 있다 달리다 보면 우드득 소리는 나겠지만』이라고 말했다. 방사선 관련 업체의 한 임원은 『익산의 양성자가속기와 정읍의 방사선과학연구소가 연계돼 RT산업은 전북에서 오지 말래도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방폐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부안은 격렬한 반대시위에 휩쓸렸고, 민주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원자력발전에 쓰인 폐기물을 보관하는 곳이 그토록 위험한 시설이라면,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지역은 이미 죽음의 도시가 됐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 자리도 없었다.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들은 얘기. 부안을 다녀온 교육부총리는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이 저도 이담에 시집가서 애 낳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해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전국에서 모인 전경들은 부안 식당들이 식사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김제 등지에서 밥을 날라다 먹었다. 식사마저 어렵자 이들은 『전북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웨고 다녔다. 한 재경 인사는 『부안이 그렇다고 하면 됐지, 왜 전라북도까지 도맷금으로 같이 넘어가나』고 한탄했다. 전경들 뿐이 아니었다. 관계 장관회의에서 일부 장관들은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부안군수는 반대자들의 린치로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했다. 그것도 사찰 경내에서. 그후 군민들은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반대로 방폐장 유치를 거부했다. 그리고 김종규 군수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 방폐장 유치 주장에 대한 징벌을 확실히 받았다. 이후 방폐장은 유치 희망지의 주민투표 득표율로 결정됐다. 군산이 노력 했지만, 방폐장은 주민들이 더 높은 지지를 보낸 경주로 넘어갔다. 이후 경주에 투입될 자금이 4조여원, 전라북도 1년 예산을 훨씬 넘는 거금이 인구 10만여명의 경주에 쏟아지게 된 것이다. 부안은 이런 호조건을 거부했다. 눈 앞의 이익을 버리고, 아니 이익은 커녕 온갖 손해를 무릅쓰고 온몸을 던져 「청정(淸淨) 부안」을 지키려 했다.
극단은 극단을 부르던가. 이런 군민들의 의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존중돼야 하며,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라도 훼손하는 어떤 시설도 들어가선 안된다는 주장도 들린다. 새만금전시관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그 자리는 원래대로 나무 몇그루 있는 동산으로 복원해줘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부안의 자연을 이제는 외부인이 지켜주겠다는 말인가? 오기 힘든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과 함께 위도 주민체육대회에 유치반대 일부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는 보도에서 보듯, 아직도 주민들간의 갈등이 풀리지 않았다는 현실 사이에서, 이래저래 재경 전북도민의 한사람은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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