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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석의 건축담론] 건축의 공공성

건축이 이념과 깊은 연계를 맺게 된 것은 건축이 공학보다는 인문학에 가까우며 사상적 유산이 삶의 방식과 연계되어 있듯 건축 역시 삶의 방식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런 사상적 운동이 한참 전개되던 1980년대 이와 연계하여 자신의 건축관을 이야기하며 건축운동을 전개한 적이 없다. 그나마 청년건축인협회에 참여했던 몇몇 소장파 건축가들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어렵게 밝혔을 뿐 기성의 건축가들은 모두 함구로 일관했다. 국내에서 근대건축운동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건축을 통한 사회 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건축가군이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건축의 공공성이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건축물이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고 있다. 건축의 공공성은 정부가 주도하는 건축에서나 찾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자산을 공유물로 이해할 것인가 사유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이 다르다. 건축을 공공적 자산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고 이 시각에 따라 건축에 관련된 모든 법과 제도들을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법과 제도에 따라 공간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담론을 세워야하며 새로운 담론이 도시에 반영되고 건축물에 반영되어야 한다. 최근 논의되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는 동양의 오랜 사상인 타자성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힘이 없는 약한 사람에 대한 인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의는 힘 있는 자에게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 뒤집혀져야 한다. 정의는 인간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쪽에 있는 것이며 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있다. 개개인은 서로 타자이다. 사회 안에서 사는 인간은 이미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의 배제와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씩 중심에서 벗어나 타자화 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타자의 공동성도 조금씩 확대되어 갈지 모른다. 타자의 공동체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이다. 건축에서 공공성을 찾는다는 것 그리고 도시에서 공공적 공간을 회복한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건축과는 완전히 반대에 서있는 것이다. 공공성이란 공공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광주의 건축사회에서 몇해전 결정한 건축물을 신축할 때마다 설계자가 한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는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건축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희생과 사랑과 봉사의 회복을 논의하는 것이다. 지금의 생각으로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축사사무소예림·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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