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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살칼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 - 이병우

이병우(전주예은교회 목사)

지금 시기는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2/6-3/22)이다. 사순절(40일)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로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회개와 경건의 삶을 통해 부활절을 맞이하는 기간이다. 부활주일 전날부터 거꾸로 날짜를 계산해서 40일 동안(주일은 빼고 계산함)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여 감사하며 보내는 시기'이다. 이 기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희생과 구속의 정신을 가슴 깊이 체험하여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여야 하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순절기간동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여 금식을 행하고, 경건한 삶을 보냈다. 즉, 철저히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세속화 되므로 신앙인의 삶조차도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희생과 섬김'이란 단어 어색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빛이 빛의 사명을 잃고, 소금이 소금의 맛을 잃을 때 이 사회는 당연히 어두워지고, 썩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문학가 쉘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에 유명한 이런 글이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는 글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다. 그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다. 나무는 그에게 이 같은 놀이터를 제공했다. 소년은 자라서 더 이상 그네를 다시 타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나무 열매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 청년이 되자 집에 땔감이 필요했다. 나무는 말했다. "내 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시오"라고... 장년이 되었다. 돈을 벌어와야겠다 나서는 그는 배가 필요했다. 나무는 말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거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좁은 문인 걸 어쩌랴!

 

오래전 어느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의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너무 크고 좋은 교회에서 사랑만 받다가 어찌보면 초라하다고 할 만큼 작은 교회를 섬기게 될 때 마음에 갈등이 있어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 저에게 어느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람들이 지켜보고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있으라고 하신다면 그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종에게 어느 후미진 산골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늘진 곳에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어 있으라 하신다 하더라도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 있겠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기도의 약속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지만 여전히 욕망과 욕심과 교만과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예수님 닮은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사람, 그리스도가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고 싶다.

 

소금인형이 하나 있었다. 소금인형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바닷가를 가게 되었다. 넓은 바다를 봐서 그런지 몰라도 바다를 보고 기뻤다. 파도가 밀려왔다. 바다가 말했다.

 

"너는 누구니?" "나, 소금인형" "넌 누구니?" "난 바다야" "야! 되게 좋네, 나 너랑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바다가 말했다. "이리 들어와" 소금은 들어갈 용기가 안 났다. 어떻게 됐겠는가? 소금인형은 바닷가로 뛰어 들었다. 바다가 소금인형에게 물었다. "넌 누구니?" "난 바다야" 소금이 아니라 바다가 되었다.

 

겨우내 언 땅을 녹여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봄기운 가득한 오늘! 자신을 녹여 바다가 된 소금인형처럼 예수의 인격이 내 안에 녹아 들어와 작은 예수이고 싶다. 주고 또 줘도 행복하기만 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고 싶다. 꽃향기 가득한 이 봄날에 나 또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어디 그런 사람 없습니까?

 

[마태복음 20장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병우(전주예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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