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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도화선 자르기 - "어머니 성 났어요?" - 전희식

전희식(농부·'똥꽃' 저자)

어떤 때는 삶의 환경들이 다 발화점이다. 과거 기억과 현재의 조건들이 모두 휘발성 높은 인화물질이 되어 분노로 타 오른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확실한 근거를 밝히면서 줄줄이 엮여 나온다.

 

놀랍다 못해 신비하다. 어쩜 그렇게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쪽으로만 모든 상상과 논리와 지식이 총 동원되는지.

 

유난히 추웠던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밥상을 들이겠다고 하면서 따뜻한 세숫대야를 방에 갖다 드렸다. 세수 하시라고 갖다드린 대야를 어머니는 거칠게 밀쳐버렸다. 물이 좀 방바닥에 엎질러졌다.

 

"방 쓸고 세수해야지 방도 안 쓸고 세수는 무슨 세수!"

 

갑자기 빗자루를 찾아 든 어머니가 방을 쓰는 동안 찌개를 데우고 식어버린 밥을 다시 펐다.

 

이번에는 청국장찌개에 된장을 왜 넣었냐고 야단을 치셨다. 된장 안 넣었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이기 먹꼬? 이 콩 쪼가리가 된장 아이믄 먹꼬?"

 

숟가락으로 청국장 콩 조각을 하나씩 떠내서 밥상에 탕탕 털어 놓으셨다. 이걸로도 모자란 어머니는 밥숟가락을 꼬나 쥔 채 성난 눈길로 밥상을 죽 훑었다. 어디로 불똥이 튈까 싶었는데 죄 없는 조기반찬이 걸려들었다.

 

잉걸불에 꼬들꼬들 하게 구워야지 비싼 조기 사다가 쪄 먹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것이다. 생선을 튀기거나 구우면 피해 갈 수 없는 '불포화 지방산' 문제가 있지만 설명 할 도리가 없다. 도올 김용옥선생을 모셔 온들 이럴 때는 어머니 화를 돋우는 재료가 될 뿐이다.

 

발아현미밥으로 불똥이 튈 차례다 싶은 때에 내가 나섰다. 밥상머리에서 성을 내면 생명의 밥이 독약이 되는지라 얼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다.

 

"어무이 성 났어요? 어무이 무지 성 난 거 같은데요?"

 

이런 말을 할 때는 최대한 환한 얼굴이어야 한다. 이가 드러나게 웃으면 더 좋다. 안 그러면 비아냥거리는 것이 된다.

 

"어머니 엄청 성나셨나 봐요. 어쩌죠? 어머니 성나서 어쩌죠?"

 

성남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은 성 났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뿐이다. 몇 마디 얼러 드렸더니 주효했다.

 

어머니 표정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는다. '그럼 성질나지 너라면 성 안 나겠어?' 하는 표정 같기도 하다. 화가 누그러든 어머니가 밥을 드시기 시작했다.

 

"어무이 아까 번에 성 많이 났었죠?"

 

어머니의 성난 일을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사건으로 돌려놨다. 어머니는 분노로 불탄 자리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하셨다.

 

"오줌 누고 화장지를 찾응 게 화장지가 있나. 청소 해 준다고 들쑤셔 쌌더니 그 년이 다 훔쳐 가버렸어."

 

방문요양사 선생님이 화장지를 다 훔쳐가서 어머니 아침시간이 망가졌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얼른 옆방에 가서 화장지를 가져왔다. 내가 잠시 가져 가 쓰고는 안 갖다 놨다고 했다.

 

"도둑놈이 따로 없지. 내가 애먼 사람 도둑으로 몰았네."

 

어머니는 청국장지개를 맛있게 드셨다. 조기도 먹다 남은 것은 고양이 밥 비벼 주라고 했다. 고양이가 할아버지 죽은 넋이라고 하면서 잘 돌봐야 한다고까지 했다.

 

/전희식(농부·'똥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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