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미륵사 사리장엄 출토기념 학술대회 원광대 60주년기념관서
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 건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대역사로, 신라와의 전쟁 속에 시달려온 백성들에게 새로운 사상이 도래했음을 전하는 희망의 징표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6일 원광대 6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미륵사지 사리장엄 출토기념 2009년 학술대회'에서 박현숙 고려대 교수는 "사비가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왕이 익산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궁궐과 미륵사를 짓게된 시기는 무왕 3년(602) 아막(阿莫)산성 전투 패전 이후의 일로 보인다"며 "정권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를 맞으면서 익산지역으로 관심을 돌리는 동시에 미륵신앙에 내재돼 있는 전륜성왕 사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격상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익산 천도설'을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익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익산은 교통로상의 중심지이자 군사적인 요충지였으며 경제적인 기반도 풍부했다"며 "무엇보다 즉위 이전까지 무왕의 삶의 터전으로 사비지역보다 익숙한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무왕대 가장 주목받았던 공간인 익산지역과 사리봉안기에 등장한 '사택씨' 세력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했다. 박교수는 "익산에 기반을 둔 세력은 익산 경영의 추진세력 또는 협조세력으로, 무왕은 이러한 후원세력을 기반으로 익산 경영과 미륵사 창건을 추진하고 왕권강화를 도모했을 것"이라며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세력은 사택씨로, 사택씨 세력의 근거지를 익산과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고 말했다.
'백제 무왕의 서동설화와 미륵사'를 발표한 나경수 전남대 교수는 "역사가 현실이라면 문학은 꿈"이라며 "사리봉안기, 즉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서동설화는 거짓으로 판명났지만 서동설화는 분명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설화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서동설화는 집단의 소망이 투사돼 꾸며진 집단적인 꿈"이라고 전제한 나교수는 "나제간의 쟁패 역시 지배자들의 욕망이었을 뿐 피지배자인 백성은 평화를 원했을 것이며, 왕권강화를 위해 세운 미륵사의 대역사 역시 동원된 백성의 입장은 참혹하기만 했을 것"이라며 "백성들의 공동작으로 만들어졌을 서동설화에는 지배자의 이념이 아니라 피지배층인 백성들의 꿈과 소망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익산 백제 미륵사지의 재발견'을 주제로 한 이날 학술대회는 전라북도와 익산시, 고려사학회가 주최하고, 고려사학회(회장 최창희 한림대 교수)와 전북역사문화학회(회장 나종우 원광대 교수)가 주관했다. 나종우 전북역사문화학회 회장은 "그동안의 학술대회가 주로 문헌사료를 연구하는 고대사학자들 중심으로 「삼국유사」와 사리봉안기 해석에 대한 논쟁 위주로 진행돼 왔다면, 이번 학술대회는 정치·사상·건축·미술·문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폭넓은 접근을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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