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섭(경제생활팀장)
# 지난주말 가족과 함께 지평선 축제를 다녀왔다.
전주를 벗어나 김제쪽으로 접어들자 길가의 코스모스와 노랗게 익은 들녘이 너무 아름다웠다.
백미러로 쳐다보니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져 있는 녀석들이 한심했다. "밖을 좀 내다 봐"라고 소리치자 고개를 돌린 아들녀석이 잠시후 한마디 했다. "그런데 아빠, 다 익은 것 같은데 왜 벼를 안베고 있대요?"
중2인 아들한데 쌀값문제를 설명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 "올해와 내년은 우리 국민들이 더욱 행복을 느낄 겁니다. 풍년에다 미질이 최고여서 먹는 재미가 있지요. 거기에 쌀값마저 싸니, 쌀을 주식으로 삼는 우리 국민들은 복받은 거지요"
지난달 남아도는 재고벼를 취재하기 위해 지역농협 RPC를 방문했을 때 한 농민이 쓰디쓰게 내뱉은 말이다.
피땀흘린 농작업으로 좋은 쌀을 국민들에 안겨줬으나 정작 농민들은 앉아서 적자를 봐야하는 아픔을 담은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추석. 농사짓는 친구가 술 한잔 먹고 어린 아들한테 허접한 수수께끼를 냈다. "풍년이어도 걱정, 흉년이어도 걱정인 사람은?"
# 풍년이면 축제를 열고, 흉년이면 끼니걱정을 해 오던게 배달민족의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과학영농을 외친 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푸념섞인 수수께끼를 내야 하는 농심은 기댈 곳이 없다.
일본의 경우 이미 70년대부터 쌀 수급계획을 마련해 '맘 놓고 농사짓는'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해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 아닌가.
지난해 불과 평년보다 5%의 풍작이었음에도 쌀값이 폭락하고 올 햅쌀가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우리의 농정이라고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해마다 추곡수매 때만 되면 붉은 머리띠에 장대깃발을 펄럭이며 트럭을 몰고 상경하던 성난 민심을 봐 온 시민들은 '아직도 저 모양인가'라고 대책없는 농정을 질타하고 있다.
마침 풍작을 맞았는데, 대북지원용으로 소요되던 40만톤마저 시중에 유통되니, 올해도 제대로 된 가격이 형성될 리 없다.
지역농협마다 자치단체의 운반비 지원을 받아 해외로 수출하는 것도, 쌀 수출국이던 호주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아직도 하늘만 쳐다보는 농업국가인가.
# 농업과 관련된 또다른 현안문제인 소값. 이미 입식된 소가 12년만에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한우값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언론과 농업전문가들이 더 오를 요인이 없는 한우 입식을 자제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으나 실제 농업 현장은 반대로 가고 있다.
농업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수치로 나타나지 않은 계산법이 우리에게는 있다. 공급이 넘치면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만 보지만, 늘어날 소비도 있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정부나 전문가들의 얘기를 거꾸로 듣겠는가"라고.
사실 탁상에서 바라보면 소 사육에 대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수입소 파동을 몸으로 겪어 낸 농가들의 이유있는 고집을 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책당국의 과학적이고 계획적인 농정이 믿음을 잃은 것도 한 요인이다.
# 올해는 21년만에 태풍없는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수확을 앞둔 농민들의 가슴에는 A급 태풍보다 무서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정대섭(경제생활팀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