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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현의 명창이야기] ⑥그림으로 남은 명창 모흥갑

"설상에 진저리친 듯"…고음소리 명성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 소리하는 광대 그림 옆에 '모흥갑'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desk@jjan.kr)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이다. 신위의 <관극시> , 송만재의 <관우희> ,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 이유원의 < <임하필기> >, 이건창의 < <이관잡지> >,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춘향가> 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신위는 소리꾼들을 불러 한 달이나 같이 지내면서 소리를 듣고 <관극시(觀劇詩)> 12편을 지었다. 그 중에 보면,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은 호남의 이름난 광대, 미칠 듯한 기쁨이 시에 갇힌 나를 풀어내네. 우렁차고 강개하기는 김용운이지, 형채기 한 마당은 천하의 절창일세."라고 하였다. 여기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모두 8명창에 드는데, 모흥갑이 가장 뒤에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나이가 좀 적었을 듯하다. 또 송만재라는 사람은 자기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를 했는데도 돈이 없어 광대들을 불러 놀 수가 없어서, 대신 광대 놀음에 관한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관우희(觀優戱)> 라는 시이다. 그곳에 보면, "장안에서 모두들 우춘대를 일컫는데, 오늘날엔 그 소리 누가 이을꼬? 한 바탕 소리에 비단이 천 필인데, 권삼득 모흥갑 아이 적부터 명창이었지."라고 하였다. 권삼득과 모흥갑이 우춘대를 이을 명창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래가 전하지 않는 판소리인 <무숙이타령> 에도 모흥갑이 <적벽가> 를 잘하는 명창으로 나온다. 이렇듯 기록에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소리를 잘해서 유명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소리하는 광대 그림 옆에 '모흥갑'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그림은 판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당시는 사진이 없었던 시절이니 오늘날의 사진이나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 <판소리연구> >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동안에 현장에서 직접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모흥갑이 판소리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그린 것만은 분명하다. < <조선창극사> >에도, 모흥갑이 "평양 연광정에서 판소리를 할 때에 덜미소리를 질러내어 십리 밖까지 들리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모흥갑이 평양에서 소리를 한 것이 인구에 많이 회자되었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 <조선창극사> >에는 모흥갑이 말년에 귀동에 살 적에 전주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한 때 자신의 수행고수였던 주덕기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를 하면서, "모흥갑은 말할 것도 없고 송흥록도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 "나는 부족하다지만, 송흥록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요, 가왕의 칭호까지 받은 공전절후의 명창이어늘 주덕기의 소행은 무례막심하다."고 꾸짖고는, 자신의 장기인 <춘향가> 의 '이별가'를 부르니, 주덕기가 엎드려 사죄하였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이로 보아 말년에는 분명히 전주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흥갑은 성량이 크고, 고음을 잘 내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학의 울음소리는 고음을 대표하고, 봉황의 울음소리는 우렁찬 소리를 나타낸다. 신재효는 <광대가> 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 또한 모흥갑의 고음을 표현한 말로 생각된다.

 

모흥갑은 <적벽가> 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 전한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 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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