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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밤을 건너온 존엄의 기록, 시(詩)가 되어 당도하다

20년간 4·3 추적한 허영선 시인 겸 전 제주4‧3연구소장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법 아닌 법 앞에서‘ 나란히 출간

(왼쪽)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 4·3 레퀴엠’(오른쪽) 시집 ‘법 아닌 법 앞에서: 4·3법정일기' 표지/사진=교보문고

70년 전, 제주의 밤은 천둥소리조차 비명이 되던 시간이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칼날 앞에 누군가는 이름을 잃었고, 누군가는 존재 자체를 지워야만 했다. 제주4·3의 심연을 20년 넘게 기록해온 허영선 전 제주4‧3연구소장이 나란히 펴낸 두 권의 시집은 어둠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헌사이다.

첫 번째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 4·3레퀴엠>(마음의숲)이 비극의 불바다를 건너온 여인들과 아이들의 생존을 풀어낸다면 <법 아닌 법 앞에서: 4·3법정일기>(마음의숲)는 70년 만에 열린 재심 법정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피어난 존엄의 기록이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4·3이 지나간 역사가 아닌 지금 우리 곁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현재형의 고통으로 소환한다.

저자의 문장은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대신 70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뚫고 나온 증언들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려는 단단함과 정직함을 담고 있다. 국가의 비수 앞에 학생복조차 입어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난 아이들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저자는 “철을 잃어버린 아이들/노래를 잃어버린 새처럼/사랑을 잃었어”('철을 잃은 아이들' 중)라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이 기록들은 연민을 넘어선 유대감의 증표이다. 저자에게 글을 쓰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슬픔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스스로 생을 밀어 올린 이들의 주체적인 역사를 입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집 <법 아닌 법 앞에서: 4·3법정일기>는 재심 법정의 건조한 기록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해냈다. 저자는 2021년 제주지방법원에서 울려 퍼진 ‘피고인 무죄’라는 글자를 붙잡아 억울하게 씌워진 낙인을 걷어내고 그들의 명예를 되찾아줬다.

이처럼 저자의 시선은 훼손된 존엄을 회복하는 일에 맞닿아 있다. 제주 4·3을 과거의 눈물로 소비하려는 관성적 태도를 거부하고 진실을 불러낸다. 시로 풀어낸 허영선의 기록은 제주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응답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가 일궈온 긴 세월이 시집을 통해 마침내 ‘무죄’라는 단단한 마침표를 찍는다. 시인의 눈으로 직시하고 역사가의 마음으로 기록한 문장들은 70년 전 비극이 오늘날의 존엄으로 승화되는 치열한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시종 재일 시인은 “이 시집은 4·3사건에 대한 끝나지 않는 기억, 이것을 계승하는 자를 겸허히 만들고 있다”라며 “거기서 사유의 깊이를 바다 울음의 여운처럼 진동시키는 음운의 힘. 어찌 경약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밝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허영선 시인은 제민일보 편집부국장과 제주4‧3평화재단 이사, 제주4‧3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해녀들>, 산문집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었겠지만>, 역사서 <제주4.3을 묻는 너에게>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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