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존 T.누난 지음, 한세·1996>한국은 '뇌물 공화국'인가?
(사례 1) "얼마 전 미국 뉴욕 타임스에 우리나라의 경조문화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기사는 뇌물인지 선물인지 모를 돈 봉투를 줄 서서 기다리다 내고, 결혼 당사자보다 부모의 하객이 훨씬 많고, 축하하러 온 건지 밥 먹으러 온 건지 '눈도장' 찍자마자 식당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 등 불합리한 우리의 결혼문화를 잘도 꼬집었다."(중앙일보 2009.12.14)
(사례 2) "서울시교육청은 인사 때마다 뒷말이 많은 곳이다. 인사를 전담해온 어떤 과는 '무슨 무슨 지역 마피아의 돈지갑'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어떤 인사 때는 인사 상납금이 '따블'이 됐느니 '따따블'이 됐느니 하는 말까지 돌아다녔다. 돈을 주고 교감·교장, 장학사·장학관 자리를 꿰찬 사람들이 일선학교나 교육청에서 무슨 일을 할 건가는 보나마나다. 교육보다는 본전 챙기기에 급할 수밖에 없다. 교육청 발주(發注) 건물은 10년만 지나면 금이 간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조선일보 2010.1.25)
(사례 3) "양산시장이 지난해 11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의 원인은 시장 선거를 치르면서 빌린 60억원인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24억원의 뇌물을 받고 부동산 개발 청탁을 들어준 것이다. 이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상당수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들이 수십억원의 직간접적인 선거비용을 쓰고 당선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2010.2.1)
한국은 '뇌물 공화국'인가? 굵직한 뇌물 관련 사건이 끊임없이 터지고, 신문지상엔 크건 작건 뇌물 사건이 빠지는 날이 하루도 없으니 말이다. 흥분하기보다는 차분하게 '뇌물'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미국의 법조인이며 법학자인 존 T. 누난(John T. Noonan)이 쓴 「뇌물의 역사」(이순영 옮김, 한세, 1996)는 뇌물이 의외로 매우 복잡한 사회적 현상임을 말해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뇌물 연구의 최대 장애는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다. 인류 역사 이래로 늘 이게 쟁점이었다. 선물과 뇌물 사이의 경계를 짓는 일에 보편주의는 적합지 않다는 게 문화 상대주의에 친화적인 문화인류학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뇌물'이라는 말을 아예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것도 선물로 보았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가르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다. 청교도 정신이 강한 미국 연방법원조차 뇌물과 선물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매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머무르고 말았다.
뇌물이라 한들 그게 나쁘기만 한 거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하버드대 행정학 교수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은 1968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부정부패는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통합적 부패'와 '분열적 부패'를 구분했다. '통합적 부패'는 엘리트 내부의 분열로 인한 폐해를 방지해 결과적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제임스 스코트(James C. Scott)는 1973년에 출간한 「정치적 부패의 비교」라는 책에서 제3세계에서 부패가 횡행하는 이유를 ①이들 나라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전통이 강하다, ②인맥·학맥·혼맥 등 인간관계의 유대를 지나치게 중시한다, ③뇌물보다 더 큰 반대급부를 정부로부터 받아낼 수 있다, ④각종 사업에 정부의 간섭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 ⑤사회의 다른 분야에 비해 관료조직의 힘이 너무 크다, ⑥공무원들의 신분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농부들의 존경을 받는다 등 6가지를 지적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닉슨 행정부에 관한 이야기다. 닉슨 행정부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생각이 워터게이트를 포함한 각종 비리 스캔들이다. 그런데 미국 역대 행정부 중 가장 강력한 반(反)부패법을 제정한 주역이 바로 닉슨 행정부라니, 재미있지 않은가.
1970년 닉슨 행정부는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와의 협조속에 '사기 및 부패금지법(Racketeering Influenced and Corrupt Organization Act: RICO)'을 제정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법은 매우 강력한 반부패법이어서 미국인권연합이 우려를 나타낼 정도였다. 물론 이 법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이 법 덕분에 1970~1977년 사이에 43명의 시장, 44명의 주 사법부 판사, 60명의 주의회 의원, 260명의 경관들이 연방정부에 의해 뇌물죄로 기소되었고 대부분 유죄판결을 받았다. 종합해 보자면, 369명의 주정부 공직자와 1,290명의 카운티 관리들이 부패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도 이 법의 희생자가 되어 중도 사임했다.
그런데 궁금한 건 왜 하필 1970년 그것도 온갖 스캔들로 얼룩진 닉슨 행정부에 의해 이런 강력한 법이 제정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이것은 어떤 특정개인의 힘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주도하는 도덕관과 가치관이 그렇게 시킨 것이라 보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주된 목표는 베트남 참전을 반대한 것이었으나, 이 운동을 계기로 해서 정당·정부 등 사회적 권위에 대한 회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 사회적 권위를 인정해준 기존의 법에 대한 회의감이 생겨나, 보다 더 강력한 도덕적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욕구가 태동했다. 법관들도 법의 권위와 공정성을 보장하는 신법(新法)의 제정에 찬성했다."
그게 전부일까? 좀더 심층적인 이유는 없는 걸까? 저자는 미국의 성도덕 변화에 따라 '순결'이 사라진 세태의 정점이 1960년대 말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과거에 성문제에 대한 순결규칙(혹은 사회적 오염을 예방하는 규칙)은 사회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 기능을 했다. 그러나 그런 순결 규칙이 힘을 잃어버리자, 공직자에 대한 순결을 강조하는 대체적 규칙이 힘을 얻게 되었다. 고대에는 성적 타락이 곧 인격의 타락을 의미했고, 그래서 뇌물을 묘사할 때 성적 비유가 많이 쓰였다. 이것은 반뇌물윤리와 성윤리가 모두 사회의 오염을 막아 주는 강력한 힘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 유산·간통·피임·간음·동성연애 등을 금하고, 결혼을 장려하고 이혼을 죄악시하던 성윤리가 서서히 퇴조하면서, 그 자리에 공직자들이 직무상의 결백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대두된 것이다. 이제 성윤리의 책임이 면제된 선거구민들은 제 멋대로 성에 탐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사회를 지탱하는 힘으로서의 공직자들이 대신 순결해져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뇌물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주장임엔 틀림없다. 우리는 편리한 이중기준을 갖고있는 건 아닐까? 나의 선물은 선물일 뿐이지만, 너의 선물은 뇌물이라는 식의 이중기준 말이다. 또 하나의 이중기준이 있다. 부정의 규모에 의한 상대 평가다. "그 돈을 먹었다 해도 그렇지, 지들이 해처먹은 것과 비교하면 그거 껌값 아니오?" 언젠가 어느 택시기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강력 옹호하면서 그렇게 외쳐대기에 그저 잠자코 먼 산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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