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신부자 지음, 전주문화원·1998>왜 순창 고추장이 유명한가?
신부자의 「전라도 장인 33인 : 신부자의 장인탐구」(전주문화원, 1998)는 저자가 PD로서 전주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전라도의 장인정신' 시리즈로 취재했던 것을 책으로 펴낸 작품이다. 대단히 휼륭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살 수 있는가? 쉽지 않을 것이다. 10여년전에 나온 책이라서 구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지난해 아니 올해 나온 책이라도 우리 지역에서 출간된 책은 돈 주고 사겠다고 발버둥쳐도 사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난 1년간 연재해온 '강준만의 책으로 읽는 세상'을 오늘로 끝내면서, 지역출판의 현실에 대해 평소 해온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신부자의 「전라도 장인 33인」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탄탄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지역사랑과 지역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모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지역경제와도 연관된 문제이다. '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에 무슨 책이냐는 식이다. 엄청난 착각이라는 걸 힘주어 말하고 싶다. 이른바 창구효과(window effect) 때문이다.
미디어업계에서 창구효과란 하나의 프로그램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서로 다른 채널을 통해 공급하여 프로그램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전략적인 배포방식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번 방송된 지상파방송 프로그램은 이후 케이블TV, 위성방송, 지역민방, 인터넷, 비디오, DVD, 해외수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또 게임, 음반, 캐릭터 등과 같은 부가산업이나 드라마 촬영지의 관광상품화까지도 활성화시킨다. 바로 이런 창구효과를 통해 프로그램은 각 미디어의 성격에 맞게 변형되고 계속 재활용되어 하나의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원 소스 멀티 유스(one-source multi-use)'의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김지운·정회경의 「미디어 경제학」)
이런 창구효과의 기본이 되는 미디어가 바로 책이다. 전북의 미래산업으로 '영상'이 외쳐지면 질수록 그 콘텐츠 공급원인 책과 출판의 가치도 인정받아야 할 터인데, 우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귀찮다고 뿌리를 자른 채 나무를 심는 꼴이다. 전북지역내 큰 서점들을 가서 살펴 보시라. 전북에서 출판되었거나 전북을 다룬 책들이 별도의 코너로 마련돼 있는가? 아니 그런 코너가 없어도 좋다. 책이 있기는 한 건가?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전북을 알고 싶어 미치겠다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책을 선뜻 소개해줄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책을 구할 수는 있는 건가? 전북의 출판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신아출판사의 이름을 아는 전북인은 얼마나 될까?
전북 관련 책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언젠가 신아출판사에 직접 연락을 해 그간 나온 책을 모두 한꺼번에 구입한 적이 있다. 사실 신아출판사야말로 전북학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간 지역 관련 책들을 많이 출간해왔다. 이 책들을 널리 읽히게 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필자들이 전북사랑·전북연구에 뛰어들게 할 수는 없을까?
참으로 유감스러운 사실이지만, 기존 '시장논리'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잘 아실 것이다. 한국시장 전체를 상대로 한 책도 나가질 않아 출판사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인구 200만도 안되는 전북에서 '시장논리'에 따른 출판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하는가? 좋다. 그게 모든 전북인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말하는 전북인은 거의 없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어떤 식으로건 '지역'을 내세우면서 시장논리를 초월한 주장과 호소들을 많이 내놓는다. 물론 그런 일을 위해 적잖은 예산이 투입된다. 그렇다면 책과 출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책과 출판이라고 하면 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각 지자체별로 가칭 '영상 콘텐츠 발전 위원회'라는 민간위원회를 구성해보면 어떨까? 이 위원회가 평가와 심사를 맡아, 전북 관련 책의 출간에 재정 지원을 해주는 건 어떨까? 돈 많이 들지 않는다. 건당 수백만원이면 족하다. 전북발전에 큰 도움이 될 책을 내려는 사람에게 자비(自費) 출판을 하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아니 그래서 전북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정보·지식·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아예 책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연 이대로 좋은가?
신부자의 「전라도 장인 33인」은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금하다. 어디 그뿐인가. 전북의 문화정책에 대한 검증은 그들의 입을 통할 때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 그 후속편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전북의 거시적인 발전전략에 대해서도 지역대학의 교수들이나 관련 전문가들이 책을 내고, 그걸 근거로 신문지상 논쟁과 방송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지역대학 교수들이 전북을 넘어서 대한민국 전체만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더욱 아름다운 건 '땅을 딛고 서 있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보는 게 아닐까?
지자체에서 펴내는 각종 간행물들이 많다. 그 상당부분을 민간 영역으로 돌려보자. 관(官)은 아무리 성실하고 양심적이라 하더라도 그 특유의 관료적 매너리즘 때문에 대중과의 적극적인 소통 의지가 약한 법이다. 그간 지자체들이 펴낸 지역 역사서들이 꽤 나와 있다. 돈을 적잖이 들인 만큼 알찬 내용들도 많다. 그런데 아쉬운 건 책을 시장에서 팔아 보려는 마인드가 없기 때문에 '상품화'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 조금만 더 정리하고 구성을 이렇게 했더라면" 하고 안타깝게 생각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책들은 한결같이 도서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비매품(非賣品)이다. 누가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그걸 읽으려고 할까?
지역내 서점들도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어떨까? 잘 읽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을 지역 관련 책들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한다는 건 손실을 유발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한다. 그래서 그건 감히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서점의 구석 한 편에라도 전북 관련 서적들을 모아서 작은 코너 하나쯤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야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겠지만, 손해를 보면 얼마나 보겠는가? 하나의 새로운 풍토를 만들어나가는 일이고, 바람직한 풍토 조성이 이루어진다면 그 만한 보상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무슨 '지역'이냐, 전북도 범수도권이다, 그러니 서울 하늘 바라보면서 살아가자, 지역대학 가려는 학생들에겐 어떻게 해서건 서울소재 대학 가라고 모멸하고 압박을 넣자, 그렇게 거창하게 살아야지 쫀쫀하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전북 타령인가? 민관(民官) 합동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넌센스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보자. 왜 순창 고추장이 유명한가? 당신은 그걸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가? 「전라도 장인 33인」의 '문정희편'(336~345쪽)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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